反은 ‘낭떠러지’를 뜻하는 엄(厂)과 ‘손’을 뜻하는 우(又)의 합자이다. 손으로 기어서 절벽을 되돌아 올라간다는 데서 ‘돌이키다’를 뜻한다. 省은 ‘작다’의 뜻인 少와 ‘눈’의 뜻인 目의 합자이다. 작은 물체를 보려면 자세히 봐야 한다는 데서 또는 사물을 자세히 볼 때 눈을 작게 뜨고 본다는 데서 ‘살피다’라는 뜻을 나타낸다.
察은 집의 뜻인 면(宀)과 제사의 뜻인 祭의 합자로 제사를 지낼 때는 집이 깨끗한지 또는 제수(祭需)가 제대로 마련되어 있는지 주의해서 봐야 한다는 데서 ‘살피다’라는 뜻을 나타낸다. 반성(反省)이나 성찰(省察)이나 일의 잘잘못이나 옳고 그름을 깨닫기 위해 스스로를 돌이켜 살피는 것이다.
살핀다는 점에서는 같으나 그 쓰임은 다르다. 반성은 비교적 단기적이고 개인적인 것이나 성찰은 그렇지 않다. 성찰은 장기적(長期的)인 것이고 사회적(社會的) 것이다. 일기를 쓰면서 그날의 일과를 반성한다고는 하나 성찰한다고는 하지 않는다. 성찰은 지난 일을 되돌아보며 넓고 깊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도 남의 허물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언행(言行)을 깊이 살피는 것이다. 내면을 깊이 응시(凝視)하는 것이다. 사기(史記)에 ‘눈은 잔털의 끝을 볼 수 있어도 자기의 속 눈섭은 보지 못한다(目見毫末不見其睫)’고 했다. 이는 남의 허물은 눈에 잘 띄지만 자신의 허물은 알아차리지 못함을 이르는 말이다.
남을 탓해서는 안 된다. 자신을 탓해야 한다. 성찰해야 한다. 넘치면 기운다. 모자라도 그렇지만 지나쳐선 얻을 게 없다. 오히려 잃는다. 대통령은 민심(民心)을 잃고 여당은 정의(正義)를 잃으며 야당은 명분(名分)을 잃고 유족들은 공감(共感)을 잃는다. 공자(孔子)는 주나라 종묘(宗廟)에서 말로만 듣던 기기를 보곤 이렇게 탄식(歎息)했다.
“오호라, 세상에 넘쳐서 기울지 않는 법이 어디 있으랴.” 바로 오늘 우리 대한민국의 탄식이 아닌가? 내용 없는 사유(思惟)는 공허하고 사유 없는 내용은 맹목(盲目)이다. 오늘의 시국(時局)이 그렇치 않은가? 주변만 두드려서는 안 된다. 핵심(核心)을 비켜가선 안 된다. 정곡(正鵠)을 찔러야 한다.
정치(政治)만 그런 게 아니다. 언론(言論)도 그렇다. 반성하고 성찰해야 한다. ‘政은 正也’라 했다. 정치(政治)는 義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올바르지 않으면 백성이 따라주지 않는다는 말이다. 다문궐의(多聞闕疑). 조선일보사 사옥을 들어서면 입구 벽면을 가득 채웠던 1920년 3월 7일자 창간 기념호 확대사진의 글귀다.
‘많이 듣되 의심나는 것은 제외하고 그 나머지도 살펴서 말한다(多聞闕疑 愼言其餘)’란 여덟 자다. 쏟아져 들어오는 많은 소식 중에 믿을 만한 것만 가려서 신중(愼重)하고 책임 있는 말을 해달라는 주문이다. 논어(論語) ‘위정’편에 나오는 말이다.
자장(子張)이 물었다. “선생님! 벼슬을 구하는 것에 대해 가르쳐 주십시오.” 공자께서 대답하셨다. “우선 많이 들어라[多聞]. 그중에 조금이라도 의심이 나거든 그것은 제외해야지[闕疑]. 나머지 믿을 만한 것도 조심조심 살펴서 말해야 한다. 그래야 허물이 적게 된다. 또 많이 보아야 한다[多見]. 그중 위태로운 것은 빼버려야 한다[闕殆]. 그 나머지도 삼가서 행해야 한다. 후회할 일이 적어질 게다.
말에 허물이 적고 행함에 뉘우침이 없으면 녹(祿)은 절로 따라오는 법이다.” 조선일보뿐만 아니라 모든 언론이 다 그러해야 한다. 인능홍도(人能弘道)요, 비도홍인(非道弘人)이라. 애써 정의의 길을 넓혀야 하건만 툭하면 정의를 들먹이며 다들 제 이름만 날리려고 한다는 말이다. 오늘의 정객(政客)들이 다 그러하지 않는가?
경공이 제나라를 제2의 전성기로 이끈 것이나 태종이 ‘정관의 치(貞觀之治)’를 이룬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거침없이 직언할 줄 아는 신하(臣下)와 거기에 귀 기울이는 군주(君主)가 ‘환상의 콤비’를 이룬 덕이다. 쓴소리가 국정에 약이 됨을 모를 리 없겠지만 하는 쪽도 듣는 쪽도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청대 ‘강건성세(康乾盛世)’의 주역 옹정제가 입에 발린 소릴 애써 경계(警戒)한 건 그래서다. 우리는 어떠한가? 성찰하고 또 성찰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