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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용 칼럼] 하늘에서 온 신선 이태백(李太白)


이희용 기자 / heeyeong1@hanmail.net입력 : 2015년 04월 18일
 
↑↑ 이희용 철학박사, 포천신문자문위원회
ⓒ (주)포천신문사 
이백(李白;701-762)은 중국 당(唐)나라 때의 시인으로, 본명은 이태백이고 자는 태백(太白)이었다. 그의 출생지와 혈통에 관해서는 촉(蜀)의 면주(綿州)에서 출생했다는 설과, 5세 때 아버지와 함께 서역에서 이주해왔다는 설, 그리고 아버지가 상인이었다는 것과 서북 지방의 이민족이었다는 말도 있어 일정치는 않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는 경제적으로 매우 풍족한 가정에서 태어났고, 호방한 성격으로 검술에도 능했고 의협심도 강해서 항상 약한 사람을 잘 돌보았으며, 25세 무렵까지 일시적인 여행은 했으나 대체로 촉나라에서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일찍부터 독서를 좋아했고 15세 무렵에는 시문 창작에도 높은 기량을 보였다고 한다. 20세 무렵에는 임협(任俠)의 무리와 사귀었으며 칼로 사람을 베었다는 기록도 있다. 20대 중반에 고향인 촉을 떠나 약 10년간은 안릉(安陵)을 중심으로 생활했으며, 27세경 그 지방의 명문 허어사(許圉師)의 손녀와 결혼했고, 35세 무렵에는 산동(山東) 지방을 중심으로 각지를 돌아다녔다.

그 후 40세 무렵 공소부(孔巢父)·배정(裵政) 등 은일하는 지식인들과 함께 죽계(竹溪)에 모여 술에 취해 생활했다. 당시 이를 '죽계의 육일(六逸)’이라 했다. 이백의 나이 42세 가을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장안에 나온 것으로 보인다.

친하게 지낸 도사 오균(吳筠)이 조정에 입조하면서 그의 추천으로 벼슬을 하게 된 듯하다. 장안에서는 당시 도교사원이던 자극궁(紫極宮)에서 당시 유명했던 태자의 빈객 하지장(賀知章; 659~744)을 만나 그로부터 ‘천상의 적선인(敵仙人, 하늘에서 귀양 나온 신선)’ 으로 찬양되면서 그 명성이 순식간에 장안의 시단에 퍼졌다.

얼마 뒤 현종(玄宗)을 알현하여 시문의 재능을 인정받아 한림공봉(翰林供奉)으로 임명되었으나, 이 직책은 궁궐에서 시만 쓰는 요즘 말로 비정규직이었다고 한다. 이때가 이백의 일생 중 관직에 몸담았던 시기이며 이한림·이공봉 등의 호칭도 이 무렵 나온 것으로 보인다.

조정에 나가는 일을 누구보다도 희망하였던 이태백이었기에, 궁중 시인으로서의 삶은 그에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마음을 달래고자 더 술을 마시며 시를 썼으며, 유난히도 달을 벗 삼아 많은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또한 정식으로 관직에 임명되지 못한 자신의 처지에 대한 울분을 달에게 표현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던 어느 날, 현종이 궁중에서 잔치를 벌이고 새로운 노래를 발표하게 되는데 황제는 이태백의 시로 가사를 붙이고자 그를 찾는다.

명령을 받은 관원들이 술에 취해 세월을 보내며 그날도 만취해 있던 이백을 억지로 궁궐로 데려오게 된다. 만취한 이태백이 황제를 모시던 환관 고역사에게 신발을 벗기라고 시키는 취중 하대를 했다. 이런 행위에 환관 ‘고역사’는 자존심이 무척 상했던 모양이다.

물론 이태백은 취중에서도 기가 막힌 시를 지었으니 그것이 바로 「청평조(淸平調)」라는 시이다. 그 구절이 얼마나 절절하고 좋았으면 양귀비도 그 가사를 종이에 적어 다니며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환관 ‘고역사’의 모함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세 편의 시중에서 세 번째는 이러했다.

「청평조삼수지삼(淸平調三首之三)」 "名花傾國兩相歡,(명화경국량상환), 常得君王帶笑看.(상득군왕대소간). 解釋春風無限恨,(해석춘풍무한한), 沈香亭北倚闌干.(심향정배의난간). 아름다운 꽃과 경국지색 둘 다 얻어, 언제나 임금은 기뻐하며 웃음 띠고 바라보네. 봄바람 무한히 질투할 줄 알면서도, 그들은 침향정 북쪽 난간에 기대어 있네."

황제의 호출에 술에 만취하여 궁궐에 끌려왔을 때, 이태백이 환관 고역사에게 신발을 벗기라고 시킨 것에 불만으로 자존심이 상했던 환관 고역사는, 양귀비에게 이태백이 지은 시가 귀비를 빗대어 욕을 하는 글이라며 모함을 하기에 이른다.

환관 ‘구역사’의 사적인 고자질을 들은 양귀비는 현종에게 이태백이 자신을 욕보이려 시를 지었다고 일러바쳤고, 양귀비에게 빠져있던 현종은 이태백의 재능은 아깝게 여기면서도 결국 그를 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이태백은 서기 744년 장안을 떠나 중국 전역을 주유하며 불후의 명작을 남기게 된다.

물론 그는 자신의 실력을 몰라주며 단순히 황제가 필요할 때 시를 지어주는 궁중 시인 생활에 환멸을 느끼기도 했고, 자유분방한 그의 성품은 법도와 체면을 중시하는 궁중 사회에 적응하기에는 너무도 장벽이 많았을 것이다. 이때 그는 화려한 명성보다는 굴절된 고독을 느꼈으며, 궁중 시인으로 있던 3년이라는 기간 동안에 주옥같은 많은 작품과 다양한 경험을 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현존하는 이태백의 작품은 1,000여 수에 달하며, 시의 소재나 형태로 보아 중국 고전시의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있으며, 현재에도 민요나 유행가에서 달을 표현할 때는, “이태백이 놀던 달”이라고 말할 정도로 그가 달을 얼마나 좋아했는지를 확인해 주고 있다.

이 희 용 / 철학박사, 경북중학교운영위원장, 문화평론가, 한국스카우트경기북부연맹 이사, 전경기도예총부회장, 포천신문 자문위원
이희용 기자 / heeyeong1@hanmail.net입력 : 2015년 04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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