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현재 / 대한교통사고인복지회 포천지회장, 포천신문 노인명예기자 이사. 통일이발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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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고뇌를 지고 긴 세월을 지내오면서 1975년 3월 1일 결혼하여 39년이 지났지만 문득 먼저 간 아내 생각이 나서 간절하게 몇 자 적는다.
1993년 3월 24일 새벽 6시 30분경 아침에 일어나려고 하는데 온몸이 마비가 되면서 움직일 수 없었다.
“정호야! 정호야!” 아들을 부르니 아내는 식사를 하다 말고 와서 “여보 왜 그래요?”얼굴이 노랗게 질린 표정으로 “몸이 말을 움직이지 않아! 좌측 팔 다리가 마비되었나 봐 움직일 수가 없어!” 아내는 급히 택시를 잡으려고 밖으로 나갔다. 때마침 이웃에 사는 후배 문성이가 나와 있어서 자기 자동차로 의정부 병원으로 급히 나를 후송해주었다. 병원에 도착해 온몸에 링거주사를 꽂았고 몸은 점점 더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였지만, 정신만은 맑아졌다.
시간은 벌써 오전 11시, 작은 형님이 연락을 받고 병원에 도착하여 승합차로 서울 연희동 동서가 운영하는 한방병원으로 급하게 차를 달렸다. 차 안에서 본 하늘은 강한 빗줄기가 하염없이 내렸다. 서울 병원에 도착하니 오후 2시 응급실에서 응급조치를 하고 2층 병실에 누워있는데 문래동 동생들과 누님이 연락을 받고 달려와 있었다. 그러나 몸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는 반신불수가 되어 대소변을 받아내야 하는 내 신세가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문병을 왔던 큰 형님 내외는 사람도 짐승도 아닌 내 모습에 동생 하나를 잃었구나 하는 눈빛 같았다.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돈이 무엇인지 마흔아홉 한창 열심히 살아야 할 나이 몸은 불구가 되어 육신의 형제도 포기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5월 27일 5층 50호실 입원을 하면서 지루한 투병생활을 시작했다. 이따금 선생님이 침 몇 대 찔러주고 가지만 마비된 몸은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기를 일주일이 지나니 간병하느라 지쳐서 녹초가 되었지만 짜증 한번 부리지 않는 아내의 지친 모습을 바라보니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지루한 투병생활을 이겨내려고 같은 병원 정태경, 조명자, 김교삼 등과 살아온 세월 이야기를 하면서 함께 울고 한탄하면서 내 육신에 찾아온 변화를 이겨내기 위해 남몰래 무던히도 노력했다.
그래도 내 마음은 점점 더 서러워졌다. 주위 사람들이 병문안을 왔지만 마비된 몸을 보이기가 심히 꺼려졌다. 무거워져가는 몸을 원망하며 찬송가, 성경책을 끌어안고 애타게 부르던 찬송가 소리, 그러나 한번 망가진 몸은 도무지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제 저의 영혼을 거두어가 소서 이 못난 남편을 간병하느라 파죽음 되어 있는 불쌍한 처를 주님 보살펴 주소서-’ 못난 남편을 간호하느라 앙상하게 뼈만 남은 사랑스러운 아내의 두 뺨에 흘러내리는 눈물
아내는 고3인 아들을 돌보기 위해 병원에서 이틀, 집에서 이틀을 왕래하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내 곁에 모든 사람을 고생시키는구나 하는 생각만이 나를 지배했다. 그러면서 나는 이렇게 기도했다. “주여 차라리 저의 생명을 거두어 가십시오”라고 그러다가 지쳐서 잠이 들었다. 깨어나 보니 또다시 몸은 마비되어 움직일 수 없는 현실에 절망했다.
그렇지만 투병생활은 이제부터였다. 병석에 누워 있으니 몸은 점점 굳어지면서 한 발짝 떼는 것이 쌀 한가마니 짊어진 것보다 몇 배 힘이 들고, 머리는 어지럽고, 하루하루 산다는 것은 지옥 같은 느낌이었다.
눈물은 흘러 손수건도 흠뻑 젖고 콧물, 눈물 범벅이 된 내 얼굴, 전신이 만신창이가 된 몸. 집 앞에 있는 농협 수돗가에 앉으니 전에는 형님, 아우 부르며 친하던 사람들도 나를 멀리하는 것을 뼈저리게 느껴졌다.
근처 초등학교를 오가며 운동을 계속하지만 마비된 몸은 좀처럼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오른쪽 다리 힘으로 왼쪽 다리를 질질 끌면서 다니는 처지가 되어, 뒷산을 오르다가 힘이 들어 처와 함께 나무 밑에 누워 있노라면 한심하고 답답하고 전화 한 통이나 찾아오는 사람 하나 없으니 외로움은 더욱 깊어만 갔다.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