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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용 칼럼] 한식(寒食)과 포목소사(抱木燒死)


이희용 기자 / heeyeong1@hanmail.net입력 : 2015년 04월 06일
 
↑↑ 이희용 철학박사, 포천신문 자문위원
ⓒ (주)포천신문사 
춘추시대(春秋時代) 제나라의 환공에 이어 두 번째 패자(覇者)가 된 왕은 진(晉)나라의 문공(文公)이었다. 그는 여러 나라를 떠돌며 어려운 처지와 몸이 부서지는 고초 끝에 왕위에 오르게 된 인물이다.

일찍이 제나라 환공의 딸 제강이 진나라 군주에게 시집을 갔는데, 군주가 죽고 그의 아들 헌공이 아직도 젊고 아름다운 제강을 아내로 삼는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여인을 아들이 차지한 기이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 후에 적(狄)족의 자매를 후궁으로 가지는데 언니는 중이(重耳)를 낳고, 동생은 이오(夷吾)를 낳게 되는데, 이밖에도 헌공은 수많은 여인을 부인으로 맞이한다.

그러던 중에 서안 동쪽에 임동근처 여산 아래에서 흥기하던 융(戎)족을 정벌할 때 바치어진 여인으로 이름은 여희이다. 이 여인은 자신의 조국을 짓밟은 진나라를 망하게 하겠다는 앙심을 품고 있었다.

중이의 아버지 헌공의 애첩이 된 여희와 의 사이에서 이복동생 혜제가 태어나고, 미색에 빠진 부왕은 이복동생을 태자로 삼고 위의 형제들을 모두 변방으로 축출한다. 여희는 자신의 아들인 태자 해제의 지위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 설치니 중이와 이오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 타국으로 망명한다.

헌공이 죽자 혜제는 왕위에 오르나 살해된다. 그러자 가까운 곳으로 피신해 있던 동생 이오는 중이보다 신속하게 귀국하여 진나라 왕위를 차지하여, 이때부터 중이의 시련은 더욱더 가중된다. 형의 자리를 찬탈한 동생은 형의 존재 자체가 불안하였기에 암살을 꾀하며 자객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런 시기가 오히려 그에게는 강한 의지와 올바른 사람을 볼 줄 알고 그런 사람들을 모으는 안목을 갖게 되었다. 당시 신하 중에 개자추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어려운 가운데서도 주군인 중이를 성심성의껏 보살피며 운명을 같이 하며 보필하였다.

한번은 너무 기진하고 허기가 져 헛것이 보이고 정신을 잃고 쓰러졌을 때, 개자추는 어디서 생겼는지 고깃국 한 그릇을 중이(重耳)에게 바쳤다. 그는 몇 날을 굶은 터라 허겁지겁 그 고깃국을 비웠다. 배가 불러지고 정신이 들자 중이는 이 상황에 어디서 고깃국을 구했을까 궁금해 졌다. 그래서 개자추에게 고깃국의 출처를 따져 물었다.

묵묵부답으로 말이 없는 그를 보자 더 궁금해져 다른 신하들에게 물어보니, 그 고깃국은 개자추의 허벅지 살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개자추가 한 쪽 다리를 절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는 개자추를 마음의 충신으로 여기고 고맙게 느꼈다.

몇 해가 지나자 이렇게 목숨을 비참한 도피생활을 하던 중이는, 결국 동생 혜공이 죽자 귀국하여 마침내 진나라의 왕으로 등극하는데, 이때 그의 나이 62세였고 그 후 8년간을 재위BC635~BC628)하게 된다.

제국간(諸國間)에 맺어지는 회합이나 맹약인 회맹(會盟)의 맹주(盟主)가 된 자를 패자라고 했는데, 춘추시대 5인의 패자를 춘추오패라 하는데, 제(齊)나라의 환공(桓公), 진(晉)나라의 문공(文公), 초(楚)나라의 장왕(莊王), 오(吳)나라의 왕 합려(闔閭), 월(越)나라의 왕 구천(勾踐)을 말하는 것으로, 중이는 진나라 문공을 말하는 것으로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중이가 진나라의 왕이 되게 되자 같이 방랑의 길을 떠돌던 신하들은 각자 자신의 공을 자랑하여 이른바 논공행상을 논하며 벼슬자리를 놓고 다투게 된다. 정사에 바쁘고 신하들의 감언이설에 속아서인지 문종은 자신이 위험에 처했을 때, 허벅지 살을 잘라서 주군에게 바쳤던 개자추(介子推)에 대한 생각은 아예 잊어버리고 말았다.

자신의 명리 앞에서는 남의 공을 가로채는 탐욕의 무리들로 가득하게 되었던 신하들은, 그렇게도 진 문공에게 충성을 다했던 개자추에 대해 상을 주자는 의견은 전혀 없었기에 이른 서운하게 생각하여 그는 낙향하여 면산에 들어가 숨어 버렸다.

나라도 안정을 되찾고 평안해지자 어느 날 고깃국을 앞에 둔 진 문공은 문득 개자추 생각이 났다. 그 때 개자추의 허벅지 살이 아니었다면 오늘에 내가 있을 수 있었을까? 하며 개자추를 찾았다. 그러나 중요한 직위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개자추는 없었다. 백방으로 수소문 해보았더니 이미 노모를 모시고 면상산(綿上山)으로 숨어 들어간 뒤였다.

처음에는 신하들을 시켜서 중요한 직책을 줄 터이니 산에서 내려와 정사에 가담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꼼짝하지 않아, 문공이 직접 나서 면산에 들어가 찾아보았으나 이미 마음을 정한 개자추는 더 깊숙이 숨어 들어가 찾을 수가 없었다.

너무도 안타까운 마음에 산에 불을 지르면 그가 나오겠지 하는 생각으로 온산에 불을 질렀으나 개자추는 끝내 나오지 않고, 문공 일행이 잘 보이는 곳에서 버드나무를 끌어안고 불에 탄 시체로 발견되는데 이를 일컬어 개자추의 포목소사(抱木燒死)라고 한다.

진 문공은 불에 타죽은 개자추를 보고는 하늘을 우러르며 통곡을 하였고, 불을 지른 것이 잘못임을 깨닫고 말하기를, 앞으로 이날에는 제사를 지내서 개자추의 원령을 달래주되, 절대로 불을 사용하지 말라고 명한다.

그래서 그날에는 찬밥을 그대로 먹으며 제사를 지내는 날로 자리하여 찬밥을 먹는다는 의미의 한식(寒食)이라고 이어졌고, 개자추가 불에 타죽은 면산은 그때부터 개(介)산이라고 칭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나라에서는 이날 종묘와 각 능원(陵園)에서 제향을 올렸고, 민간에서는 제사지내는 절사(節祀)를 행했으며, 여러 가지 주과(酒果)를 마련하여 성묘하고 조상의 묘가 헐었으면 봉분을 개수하고 주위에 나무도 심고 사초(莎草)도 하는 날로 이어지고 있다.


이 희 용
철학박사, 경북중학교운영위원장, 문화평론가, 한국스카우트경기북부연맹 이사, 전경기도예총부회장, 포천신문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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