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세상의 이치가 그렇지 않느냐?’, ‘자연의 섭리를 벗어나서 살 수 있느냐?’ 라는 말을 자주 한다. 섭리(攝理)나 이치(理致)나 그게 그거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때로는 고민(苦悶)한다. 섭(攝)이라는 것은 원칙(原則)을 말하는 것이다. 자연계(自然界)를 지배하는 이법(理法)을 말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법전(法典)이다. 자연계를 다스리는 원리(原理)이다. 그것은 원심력(遠心力)과 구심력(求心力)이다. 원심력과 구심력을 벗어나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다. 리(理)라는 것은 원리를 충족시키는 각각의 조건(條件)이다. 섭리가 원론(原論)이라면 이치는 그 원론에 따른 각론(各論)이다.
무심(無心)한 사람들은 자연의 섭리를 모른다. 무감(無感)한 사람들은 세상의 이치를 모른다. 섭리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바람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바람이 부는 것은 누구나 느낀다. 이처럼 섭리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으나 우주(宇宙)를 다스리고 콘트롤(control)한다. 그 힘은 원심력과 구심력이고 그 기준은 균형(balance)과 조화(harmony)라는 잣대다. 세상만사 균형과 조화를 잃으면 소용이 없다. 균형과 조화라는 잣대 속에 놀아나기 때문이다. 이치는 볼 수 있는 것이다. 관찰(觀察)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이다. 각(覺)의 경지에 들지 않더라도 지식(知識)과 지혜(智慧)로 가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이치에 어긋나는 말을 하면 제지(制止)당하고 구설수(口舌數)에 오른다. 이치에 어긋난다는 것은 정당한 조리(條理)에 어긋난다는 것이고 근본(根本)과 도리(道理)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조리란 조건(條件)을 말하는 것이다. 섭리를 충족시켜주는 조건을 말하는 것이다. 근본과 도리는 진(眞)을 말하는 것이다. 참을 말하는 것이다. 참에 반대되는 말에 사이비(似而非)란 것이 있다. 사이비란 한마디로 가짜란 말이다. 겉으로는 같아 보이나 실제로는 전혀 다르거나 아닌[非] 것이다. 가짜이기 때문이다. 사이비에 현혹(眩惑)돼서는 안 되는 이유이고 사이비에 넘어가서도 안 되는 이유이다.
우리들이 체험하는 것은 음양오행(陰陽五行)이다. 음양오행의 법칙에 따라 만물(萬物)이 오고간다. 음양이 시간(時間)의 굴레라면 오행은 공간(空間)의 굴레다. 그리고 관계(關係)의 굴레다. 상생상극(相生相剋)의 관계 속에 돌고 도는 것이다. 상생만 해서도 안 되고 상극만 해서도 안 된다. 상생상극을 해야 한다. 생하고 극해야 균형(均衡)을 이루고 조화(調和)를 이룬다. 그래서 균형과 조화의 잣대를 말하는 것이다. 비결(秘訣)은 간단하다. 과유불급(過猶不及) 지나치지 않으면 된다. 고집 부리지 않으면 된다. 남을 탓하기 전에 자신의 행실부터 되돌아보면 된다. 타인을 배려(配慮)하면 된다. 남을 돌보면 된다.
자연에서 배우고 역사(歷史)에서 배워야 한다. 그 속에 섭리와 이치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자연 앞에 겸허(謙虛)해야 하고 역사 앞에 겸손(謙遜)해야 한다. 자연의 섭리를 놓고 보면 인간은 한낱 미물(微物)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라는 커다란 틀을 놓고 보면 우리의 갈 길이 훤히 보인다. 자연을 거스르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무병장수(無病長壽)한다. 역사의 교훈(敎訓)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영원한 강자도 없고 영원한 패자도 없다. 영원한 친구도 없고 영원한 적도 없다. 안거위사(安居危思) 편안할 때 위험을 생각하라는 말이다. 난중일기(亂中日記)가 말하고 있지 않은가? 징비록(懲毖錄)이 말하고 있지 않은가?
우물 안 개구리는 세상 밖을 모른다. 하루살이는 하루 밖의 시간을 모른다. 그 이상의 세상을 모른다. 그 이상의 세계를 모른다. 그래서는 안 된다.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정세파악(情勢把握)을 잘 해야 한다. 당랑포선(螳螂捕蟬)이란 말이 있다. 이득에 눈이 어두워 뒷일을 생각지 못한다는 뜻이다. 매미, 사마귀, 참새는 모두 눈앞의 이득에만 정신이 팔려 등 뒤의 위험을 몰랐던 것이다. 지금 우리의 형세가 어떠한가? 자성(自省)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