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대중에게 인기도 많이 떨어졌고 영향력도 전 같지 않지만 여전히 문제적 현실에 가장 민감히 반응하고 경고음을 발하는 것은 문학의 본성인 듯싶다. 문학동네 2014년 겨울호의 소설들은 그런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잡지의 소설 란은 김훈으로부터 김연수, 은희경, 김영하, 박민규, 손보미까지 11명의 작가, 그야말로 원로작가에서 신진작가 까지 총망라한 필진으로 채워졌다. 그런데 이 소설들이 공교롭게 한결같이 어둡다. 원로와 중견, 신진을 포함한 모두가 다 그렇다. 어두운 정도가 아니라 지옥도를 펼쳐 보인다.
김훈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젊은이들의 삭막한 세태를 건조하게 그린다. 이 소설의 노량진 구준생(9급 준비생)들은 대개 고시원 생활을 하지만 좀 더 여유가 있으면 방을 빌려 일종의 조건 만남식의 동거를 한다. 시험이 되면 그것으로 끝이고 관계도 끝난다. 낭만이나 꿈과 같은 항목이 이들의 삶에는 소거되어 있다. 천명관은 빈부의 격차로 인해 폐허가 되어버린 미래를 그린다. 이 소설에 나오는 빈곤층은 이제 모두 노숙자가 되어서 아이가 죽어가도 살릴 약도 제대로 구하지 못한다.
정부도 사라지고 슈퍼리치들이 세상을 장악한 미래 세계에서 슈퍼리치들은 약값이 얼마나 오르는가 내기를 즐긴다. 그런가 하면 박민규의 소설에서 신은 세상의 전부를 소유한 물신(物神)이다. 이 신이 고용과 해고를 주재한다. 이제 물신(物神)이 진정한 신이 되어버린 이 세계에서 이유도 모른 채 아이를 잃은 한 아버지가 그 이유를 물신에게 묻고 저항하려 하지만 역시 신은 신답게 답이 없고 절망한 아버지는 스스로 소실점이 되어 사라진다.
천승관과 박민규의 경우는 일종의 알레고리 소설이어서 그 충격이 좀 덜하지만 이들 중에서 가장 끔직한 지옥도를 제시하는 작가는 김영하이다. 「아이를 찾습니다」란 제목의 소설은 아이를 납치당한 부모의 비극을 극사실적으로 그린다. 어느 날 마트에 쇼핑을 하러 간 젊은 부부가 아이를 잃어버린다. 약 10년 가까이 아이를 찾노라 삶이 파괴된 그들 앞에 갑자기 아이가 돌아온다. 아이를 유괴한 여자는 자신이 이제 아이를 키우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며 아이의 부모에게 미안하다는 단지 한 마디를 남기고 자살해 버렸다.
아이는 품속에서 재롱을 피우던 아이가 아니고 낯선 존재로 변해 있다. 부부는 직장과 집을 잃었고 특히 여자는 정신병에 걸려 아이가 돌아왔음에도 실족사로 삶을 마감한다. 비극은 이로 끝나지 않는다. 고등학생이 된 아이는 아버지의 헌신에도 불구하고 결국 가출한다. 그리고 몇 년 후, 같은 동네에서 아들과 동시에 같이 가출했던 여자 아이가 찾아와서 이 아버지에게 당신 아들의 아이라고 갓난아기를 버려놓고 도망가 버린다.
김영하는 1990년대 중반에 등단한 이후부터 끈질기게 이 세계의 무의미함, 탈출구 없는 현실, 알 수 없는 아이러니로 가득한 이 세계를 통렬하게 고발해 온 작가이다. 그러나 나는 이번 작품을 읽고 정말 끔찍하였다. 왜 이렇게 절망적 현실만을 그리는가? 아이를 유괴 당하고, 정신병적 소인이 있던 아내가 정신병에 걸리고, 직장과 집을 잃고, 돌아온 아이는 그러나 끝내 가출한다. 이는 과장된 지옥도인가, 우리 모두가 직면한 현실인가? 나는 어떤 논평도 없이 사건만을 냉정하게 제시한 작가의 의도대로 이것이 우리 현실의 한 단면임을 인정치 않을 수 없었다. 아무 죄도 없는 선량한 부부가 떨어진 지옥은 우리에게도 열려있다는 개연성을 부인할 수 없었다는 말이다.
나는 1990년대 중반 이후 신자유주의의 이름하에 자본주의가 심화되면서 인간의 어두운 본성에 절망하여 엽기적이고 충격적인 소설을 제출하던 시대가 2010년대 초입쯤엔 저물 줄 알았다. 김애란과 같은 따뜻하고 정감있는 젊은 작가가 등장하였고 이는 그동안 어둡던 문학을 바꾸는 하나의 징후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짐작은 섣불렀던 모양이다. 더 어둡고 더 우울한 기운이 한 문학잡지의 소설 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다. 특별한 기획도 아니고 그저 그 잡지의 20주년을 기념하여 세대별로 골고루 청탁한 원고들이 공교롭게도 한결같이 절망적 톤으로 메워져 있다. 아마도 세월호로 상징되는 한국 사회의 총체적 모순과 부조리, 자본주의의 폭주로 인해 야기되는 청년 실업, 빈부 격차, 물신주의 등으로 하여 앞이 보이지 않는 암담한 현실이 이들로 하여금 절망적인 절규를 토하게 한 듯하다.
그렇다 하여도 물 컵의 물이 줄어들었음을 유독 응시하는 비관주의만이 능사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내가 낸 졸작들의 모음집 괴물흥망사에서 이러한 현실 가운데도 우리의 삶을 올바로 이끄는 원리가 있을 것이라 표명하고 그러한 예스런 이념을 되살려 보고자 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또한 이들이 그린 것처럼 우연성과 비인과성, 불공정, 불균형이라는 폭력에 기롱당하고 있다. 괴테가 임종 시에 ‘빛을 좀 더(mehr licht)’란 말을 남겼다지만 정말 더 따뜻하고 밝은 빛이 간절하다. 누가, 무엇이 이 빛이 될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