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벽두부터 세계를 충격 속에 몰아넣은 파리의 테러는 테러범 세 명이 모두 살해됨으로써 끝났다. 언론인, 시민 등 무저항 상태의 십 수 명을 살해한 테러범들은 자신들도 경찰에 의해 살해됨으로써 끔찍한 만행에 종지부를 찍었다. 신문사 테러 이후 쫓기던 그들은 “깨끗이 순교하겠다”며 경찰에 저항했다는데 애초에 죽음을 각오하고 저지른 일임을 알 수 있게 한다. 2013년 보스톤 마라톤 테러에서 무고한 민간인이 200명 넘게 사상된 충격도 다 가시지 않은 시점에 벌어진 이 테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모순을 새삼 일깨운다.
이번 테러는 9.11 이후 꾸준히 지속되고 있는 서구와 이슬람권의 격화된 갈등의 재연인 점에서 냉전 이후 가장 심각한 대립은 문명 간의 충돌에서 올 것이라 본 새뮤얼 헌팅턴의 예언과도 같은 지적을 다시 한 번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는 9.11이 있기도 전인 약 5년 전인 1996년에 발간한 그의 저서 문명의 충돌에서 탈냉전 시대의 다극 다문명 시대에는 서구와 서구에 도전하는 문명 사이의 갈등이 어떤 대립보다 중심적인 비중을 차지할 것이라 예견하면서 특히 이슬람 집단과 서구 사이에서 간헐적인 소규모의 폭력 때로는 심각한 폭력 사태가 빚어질 것이라 경고한 바 있다.
헌팅턴의 예언자적 자질도 자질이지만 이번에 발생한 파리의 테러에서 내가 무엇보다 주목하는 것은 그것이 종교 간의 대립에서 비롯하였다는 점이다. 내가 보기에, 종교는 인간의 영성의 표현인 점에서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분되는 또 하나의 중요한 표지이다. 그런데 종교는 대개 나름의 도그마를 가지고 있어 실상 어떤 종교도 편협성을 지니지 않을 수 없다.
가령 우리 국민의 30퍼센트 이상이 믿고 있다는 기독교도 그 경전인 성경으로 들어가면 우리가 합리적으로나 이성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이적(異蹟)과 말씀으로 가득하다. 구약의 욥기 같은 것이 특히 그러한데 욥기는 하느님을 성실히 믿은 욥이 자식과 재산을 잃고 문둥병까지 걸리자 하느님을 원망하지만 결국은 이 세상의 모든 행복과 불행은 하느님이 주관하신다는 깨달음에 이름으로써 구원받는다는 내용이다. 이는 신 앞에서는 어떠한 의문이나 회의보다도 그에게 무조건적으로 안김으로써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종교의 도그마(Dogma)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러한 도그마가 깊어지면 남에 대한 배타성과 독선, 편협으로 이어질 소지가 생긴다.
그런데 욥기의 이러한 성격을 달리 해석한 어느 목사의 글을 보고 나는 참신한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최근 네이버에 블로그를 개설한 나는 이런저런 블로그를 순례하던 차 <한겨레신문>에 개설된 ‘시드니의 늙은 잉여’라는 이름의 블로그에 눈이 머물렀다. 나이 일흔 전후로 보이는 이 블로그의 주인은 아마 무슨 사정으로 호주 시드니에 이민을 가 있는 모양인데 목회는 하지 않지만 목사님이어서 하느님에 대해 깊이 고구하는 글이 그의 블로그에 많았다. 그 중에도 욥기에 대해 쓴 것이 이채로웠다.
욥기의 교훈은 하느님에 대한 무조건적 순종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 ‘묻고 대화하면서’ 이 세상의 고통을 극복하는 것에 욥기의 교훈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기독교인 중에는 하느님을 믿는 것으로써 자신의 자부심으로 삼고 모든 오류로부터 면책될 것이라 믿는 사람도 있는데 이는 반성해야 할 것이라고도 썼다.
더 놀라운 것은 이 목사님은 자신의 누님이 자식을 잃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고 가톨릭 신자인 누님더러 그러한 고통을 치유하기에는 오히려 불교가 더 나을 수 있다고 보고 불교로의 개종을 권했다는 것이었다. 물론 종교가 필요에 따라 이것저것 옮길 수 있다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이 분의 열린 자세에 무엇보다도 감동받았다. 요즘 스님과 가톨릭 사제가 가끔 서로의 행사에 같이 참여하면서 독선적일 수 있는 종교를 그 본뜻인 화합과 화해로 이끄는 경우를 보고 우리 민족의 특징인 다양성에 대한 이해와 포용성이 전형적으로 발휘되는 장면인 것 같아서 마음이 더웠었는데 나는 종교야말로 열린 가슴으로 타인과 타종교를 가장 뜨겁게 안아주어야 한다고 믿는다.
한 명이 미치면 정신병자라 하지만 여러 사람이 미치면 종교라고 한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의 신랄한 비난을 피할 수 있는 것도 내가 보기엔 이처럼 종교가 열린 가슴을 가질 때 가능하리라 본다.
물론 기독교와 이슬람의 갈등은 그 역사가 길어서 지리적, 정치적 성격까지 가세하면 단지 종교적 대립에 기인하는 것 만이라 할 수 없는 측면도 있겠지만 나는 모든 강력한 이념, 종교는 특히 자신의 주관과 신념에 대해 재삼 묻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인간의 인간다운 한 특성인 ‘신앙하는 인간’이라는 미덕이 길이 떨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