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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우 역사칼럼] 완평부원군 오리 이원익의 생애(2)

- 초지일관 청빈한 관리로서 생애를 마치다
포천신문 기자 / ipcs21@hanmail.net입력 : 2015년 01월 03일
↑↑ 박관우 역사작가, 칼럼니스트, <역사 속에 묻힌 인물들>의 저자
ⓒ (주)포천신문사
광해군 대에 있어서 이원익의 대표적인 업적은 대동법의 시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대동법을 본격적으로 시행하기 이전에 조광조가 공안(貢案)을 개정하여 쌀로 납부하는 방법을 제안하였으며, 더불어 이이가 특산물의 가치에 준하는 쌀을 내도록 해서 그것으로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는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을 주장한 바 있다.

아울러 류성룡은 토지결수에 따라 공물을 배정하고, 공물을 쌀과 콩으로 거두며, 그 대상은 진상을 포함하게 하자는 제안을 하였다. 이러한 배경속에서 광해군이 이원익의 건의를 수용하여 경기도에 한하여 대동법을 실시하게 된다. 여기서 대동법의 핵심은 나라에 세금으로 내었던 공물 대신에 전세로 봄,가을 두차례에 걸쳐서 16두를 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대동법을 전국적으로 실시하게 되면 기득권층의 반발이 있을 것을 감안하여 우선 경기도에 한하여 시행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원익은 광해군이 즉위 이후에 단행된 임해군을 죽이는 문제를 반대하였으며, 더불어 인목대비를 폐위시키는 문제를 반대하여 1615년(광해 7년) 강원도 홍천으로 유배가게 된다.

어느 새 70을 바라보는 노재상으로서 영의정에 네 차례 올랐고, 임진왜란시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광해군 대에 대동법이 실시되는데 있어서 견인차 역할을 하였던 이원익이 귀양길에 오르게 된 것이다.

이원익이 유배를 떠난 지 3년 후가 되는 1618년(광해 10) 인목대비는 마침내 폐위되고 서인으로 강등되어 서궁(西宮)에 정명공주에 함께 유폐되는 사건이 일어나며,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하여 광해군이 폐위되는데 있어서 중요한 명분을 제공하는 결과를 초래하는데 이미 수백년의 역사가 흐르기는 하였지만 광해군이 당시 우국충정(憂國衷情)의 심정으로 호소한 이원익의 상소를 수용하면 좋지 않았을까? 아쉬운 심정이 드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여기서 이원익의 홍천유배 시절과 관련되어 전해지는 한가지 일화(逸話)를 소개한다.

이원익은 1618년(광해 10) 폐모론에 반대하여 북청으로 유배갔던 이항복의 죽음 소식을 듣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영창대군이 죽을 때 공(公)은 간언을 하지 않으며,‘이보다 큰 일이 있는데, 대신이 한 왕자를 위해 죽어서는 안된다’ 하더니, 대비를 폐위할 때에는 극력 간하다가 끝내 삭막한 북녘 땅에서 죽는구나. 참으로 훌륭하다. 말을 잘 실천하는 사람이라 이를 만하다.”

마침내 1619년(광해 11) 5월 유배에서 풀려난 이후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경기도 여강(驪江)의 앙덕리에 머물다가 인조반정의 소식을 접하게 된다. 그런데 놀랍게도 인조반정이 일어난지 불과 사흘만에 광해군 대와 마찬가지로 첫 영의정으로 임명되며, 그로부터 1주일후에 창경궁 명정전에서 인조를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이미 서두에서 잠시 언급한 바 있으나 이원익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받았던 점은 인조반정이후 인목대비를 비롯하여 서인들이 광해군을 죽이려고 하였을 때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다는 점인데 당시의 구체적인 정황은 다음과 같다.

광해군에게 원한이 절절하였던 인목대비가 “그 인간을 반드시 죽여야만 분이 풀리겠다”고 하자, 이원익은 인조의 앞에 엎드려 눈물을 쏟으면서 “광해는 스스로 천명을 끊었으니 폐위한 것은 실로 마땅합니다. 그러나 만일 죽이기까지 한다면 노신은 일찍이 그의 신하였으니 차마 받들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신은 반드시 물러가야 하겠습니다”라고 고했다.

그러자 인조도 “과인도 그런 뜻이 있었는데, 경의 말이 그러니 어찌 그의 목숨을 보전하기를 힘쓰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는 유몽인이 한편의 시를 통하여 광해군에게 충성을 나타낸 것과는 차원이 다르겠으나 이원익이 광해군 대의 첫 영의정으로서 비록 폐주(廢主)의 신분으로 전락하였으나 그의 목숨을 구하는데 있어서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인조 대에 이원익의 업적과 관련하여 역시 대동법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광해군 대와의 차이라면 광해군 대는 경기도에 한하여 실시하였는데 반하여 인조 대에 이르러서는 충청,전라,강원도까지 확대한 삼도대동법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아울러 1627년(인조 5년)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고 소현세자는 전주로 피신하는 이른바 분조(分朝)가 이루어지는데 당시 이원익은 경기,충청,전라,경상도의 도체찰사로서 전주로 피신하는 소현세자를 호종(扈從)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정묘호란은 결국 강화도에서 조선과 후금이 “두 나라는 형제의 인연을 맺으며, 조선은 후금과 화친하되 명나라를 공격하지는 않고 후금에 왕자를 인질로 보내고 매년 세폐를 바친다” 는 조건으로 강화조약이 체결되면서 마침내 종식하게 된다.

이원익의 생애를 뒤돌아 볼 때 광해군의 목숨을 구한 것 못지 않게 깊은 감명을 받은 점은 선조,광해군,인조 등 3대에 걸쳐서 40년이상 정승에 재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늘 초가집에서 살았다는 점인데 이러한 모습을 통하여 그가 얼마나 청빈한 삶을 살았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1631년(인조 9년) 인조가 승지 강홍중을 통하여 이원익의 집이 초가집 두서너 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깊은 감동을 받아서 새로운 집을 하사(下賜)하였다는 것인데 여기에 대하여 이원익은 극구 사양하였으나 인조의 의지가 강함을 알고 결국 살게 되었다고 하며, 바로 이것이 오늘날 광명시 소하동 2동에 현존하고 있는 관감당(觀感堂)으로 알려져 있다.

선조,광해군,인조 등 3대에 걸쳐서 40년동안 정승으로 재임하였던 시대의 거목(巨木)이라 할 수 있는 완창부원군 오리 이원익은 마침내 1634년 1월 29일 향년 88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90평생의 생애를 마치게 된다.

결론적으로 청렴한 관리의 표상(表象)으로서 개인의 명예(名譽)와 부(富)보다는 국가를 위하여 한평생 바친 그의 삶은 오늘날 모든 공직자들의 귀감(龜鑑)이 되어야 할 것이다.

박관우 / pgu77@naver.com
역사작가, 칼럼니스트, <역사 속에 묻힌 인물들>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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