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는 단시간 내에 선진국 반열에 오른 모범적인 나라로 세계인들에게 평가를 받고 있다.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루고 삼성과 현대 등의 세계적 기업이 건재하며 얼마 전에 인천 아시안 게임에서는 중국에 이어 아시아의 스포츠 강국으로 자리매김을 하였다. 한국은 분명 여러 분야에서 괄목할만한 성장을 했으며, 세계를 이끌어갈 책임 있는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이 진정한 선진국이냐의 판단은 경제적 능력의 향상으로만 할 수 없다. 오히려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의 문화적 . 정신적 수준이 경제적 능력에 걸맞게 증진되었느냐의 질문에 긍정적으로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그 경제적 발전이 국민이 골고루 향유하고 있느냐의 문제도 선결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정부 어느 누구도 이런 질문에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한국의 부는 소수의 부자들에게 편중되어 있고 경제발전의 수혜를 누리는 계층은 일부 계층에 편중되어있다는 통계가 우리 사회의 병적 증상을 명확하게 말해주고 있다. 최근 최재성 의원의 발표에 의하면 2012년 배당과 이자 소득 중 93퍼센트를 상위 10퍼센트가 챙겼다고 한다. 이 통계는 우리 사회의 부의 쏠림이 얼마나 편중되어 있으며, 빈부격차가 극심함을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대표적 자본소득인 배당과 이자 소득을 극소수의 부자들이 독차지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최 의원은 “우리 사회는 노동소득 격차가 큰 상태에서 자본소득의 쏠림 현상까지 가중돼 소득불평등이 극에 달한 상태”라고 진단한 바 있다.
신자유주의라는 세계적 흐름은 능력 있는 소수들이 경제발전의 리더로서 부를 창출하고 잉여자본을 형평성 있게 분배하는 노블리스 오블리쥐 정신을 발휘할 때 의미가 있다. 그렇지 않고 그 능력으로 다수로부터 부를 탈취하고 정치권력이 이에 동조나 협잡한다면 부의 양극화 현상으로 치닫게 된다. 국민들은 정치권력과 경제리더들이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 정치와 사업을 하여 사회정의를 위해 긍정적 역할을 할 것을 기대하고 있으며, 그들은 그렇게 하겠다는 공약이나 약속을 했기 때문에 믿고 위임한 것이다.
그런데 한국 사회의 지도자들은 국민들에게 한 약속이나 믿음을 지키고 있는 것인가. 만약에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국민들을 기만하고 있다면 시저가 그렇게 믿었던 브루터스의 배반을 보고 “브루터스 너 마저! 그러면 시저는 쓰러질 수밖에!”라는 외침을 들을 수밖에 없다. 최근 국책연구원들이 연구사업비로 명품을 구입하고 그것을 선물로 나누어주는 사건이 발표되었다. 국민의 혈세를 지식인들이 개인용도를 위해서 낭비하는 행위는 얼마나 도덕적 불감증에 깊게 매몰되어있는가를 시사해준다.
정치인들은 선거를 통해서 권력을 위임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내세운 공약을 정직하게 지키지 않으면 안된다. JTBC 방송의 심층보도에서 ‘4대강 사업, 그 후’ 프로그램에서 이명박 전 정권의 대형 국책사업이었던 4대강 사업이 부조리에 총체적 부실사업으로 판명되었다. 이 사업을 위해서 문화나 복지 예산의 상당부분이 삭감되고 이를 반대하는 시민들을 종북세력으로 몰아세웠던 사업이 방송, 언론, 어용학자들에 의해서 왜곡되고 잘못되었다면 이를 믿고 수용했던 국민들이 느끼는 배신감은 어떻게 되겠는가. 아마 시저가 믿었던 친구 브루터스에게 느끼는 배신감과 좌절감에 못지않을 것이다.
지금 4대강은 녹조로 가득하고 괴기한 큰빗이끼벌레가 나타나 시민들은 당혹해하고 있다. 이 땅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현 세대가 다음 세대와 먼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우리 민족의 터전이다. 더구나 강은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들의 생명줄이다. 만약에 4대강 사업이 우리들의 생명줄을 오염시키고 끊어놓았다면 이 땅의 모든 생명체들이 정치인들에게 느끼는 배신감과 분노는 얼마나 클 것이며, 그 책임은 누가 어떻게 질 것인가.
한국 사회의 모든 시민들과 생명체들은 이명박 전 정권과 그 당시 집권당이었던 새누리당에게 외친다. “Et tu Brute, then falls Caesar!(브루터스 너마저, 그러면 시저는 쓰러지리라." 물론 시저는 황제가 되려다 공화주의자들에게 암살을 당했지만 말이다. 그는 가장 가까운 친구의 칼에 찔렸을 때 참으로 참담한 기분이었으리라. 필자는 시저역을 맡아 연기를 하며 한 인간이 측근에게 배신을 당하는 기분을 이렇게 시로 옮겨보았다.
브루터스 너마저! 그러면 시저는 쓰러질 수밖에
가장 믿었던 자에게 배신을 당할 때 쓰디쓴 쓸개를 씹는 기분으로 생명을 내던지며 외치는 시저의 외마디이다.
로마를 더 사랑하기에 친구를 죽일 수밖에 없다는 모순은 속물적 욕망으로 사랑의 감정을 잃어버린 연인들이 그들의 사랑을 미화시키려는 미사여귀나 책임을 벗어나려는 자기기만일 뿐일까.
브루터스가 단도를 들고 옆구리를 찌르며 내 숨통을 끊어놓으려 힘을 주자 난 그의 위선적인 표정에 질린 채 무대 바닥에 떨어지며 울부짖었어. 좀처럼 그의 배신이 실감이 나지 않아 극장이 떠나가게 악을 쓰지 않을 수 없었지.
아무리 머리를 짜내어도 시저를 사랑했다는 자의 입에서 나온 브루터스의 허구적 논리야. 로마를 위해서라는 추상적인 변명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속물성일 뿐 셰익스피어가 상상해낸 인간성의 최악의 상황이지. 사촌이 논을 사면 배 아파하는 공화주의자들을 비웃는 멋있는 패로디야.
박정근 / 대진대 교수, 윌더니스문학 발행인, 셰익스피어협회 회장, 포천신문 칼럼위원회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