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두법(種痘法)은 천연두로 많이 소개되어 있는 두창(痘瘡)을 예방하는 방법이라 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인두법(人痘法)과 우두법(牛痘法)이 있다.
인두법(人痘法)은 두창(痘瘡)의 독(毒)을 인공적으로 인체에 접촉시켜 그 독력(毒力)을 약하게 하는 방법이며, 이에 반하여 우두법(牛痘法)은 두창(痘瘡)에 걸린 소의 상처에서 흐르는 고름을 사람에게 접종해 두창(痘瘡)의 면역력을 얻게 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칼럼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다산 정약용과 초정 박제가에 의하여 공동연구된 인두법(人痘法)을 포천 출신 의관(醫官) 이종인이 널리 실시하여 많은 백성들의 생명을 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본 칼럼에서 소개하는 박승석은 경기도 연천에서 최초로 우두법(牛痘法)을 실시한 의학자(醫學者)라 할 수 있는데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결과는 나와 있는데 그 과정을 알 수 없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박승석이 종두인허원으로서 연천 방골에서 최초로 우두법(牛痘法)을 실시한 것을 시작으로 인근의 철원까지 실시하였다는 것인데 근본적으로 어떤 계기에 의하여 박승석이 두창(痘瘡)이라는 전염병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 그 뿌리를 알 수 없다는 점에 안타까운 심정 금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연천의 의학자(醫學者)라 할 수 있는 박승석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는지 그 세계 속으로 들어가 보기로 하자.
박승석은 조선후기인 1865년(고종 2년) 12월 19일 경기도 연천군 군내면 상리 방골에서 박기양과 연안김씨 사이에 5남중 3남으로 출생하였다.
여기서 박승석의 바로 밑에 동생이 되는 박승준과 관련된 가슴 아픈 사연을 소개한다.
박승준은 1764년(영조 40년) 공자이후 2000년동안 유학을 발전시켜 온 중국 및 우리나라 대학자들의 위패를 봉안하여 제향하는 사당인 문묘(文廟)에 마지막으로 배향된 현석 박세채의 종손(宗孫)으로 출계(出系)하였다.
현석은 조선후기 숙종 때 좌의정으로 재임한 정치가이면서 대학자라 할 수 있는데, 당시 소론의 영수로서 당쟁을 타파하기 위한 탕평책(蕩平策)을 최초로 건의한 인물이었다.
이와 더불어 현석은 청음 김상헌의 문인으로서 특히 예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대표적인 저서인 남계집(南溪集),남계예설(南溪禮說),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을 비롯하여 수백권의 저술을 남긴 대학자였다.
사실 박승준이 어떠한 과정에 의하여 현석의 종손(宗孫)이 되었는지 현재로서는 알 길이 없지만 이러한 것을 통하여 볼 때 박승석의 가문도 학자 집안이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러한 가문의 배경을 가지고 있는 박승석의 어린 시절과 관련하여 알려진 유일한 사실은 일가 친척이 되는 박도양의 아들로서 출계(出系)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청년기의 행적도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인데 엄밀히 말하여 박승석의 공식적인 첫 행적은 중년기라 할 수 있는 49세에 종두인허원 경기도 대표가 되었다는 것이니 사실상 50년동안 그가 살아 왔던 흔적을 전혀 알 수 없다는 점에 통탄스러운 심정 금할 수가 없다.
여기서 생소하게 느껴지는 종두인허원에 대하여 설명을 하면 1899년(광무 3년)에 최초로 실시된 제도라 할 수 있는데 한마디로 우두법(牛痘法)을 전문적으로 실시한 우두의사(牛痘醫師)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종두인허원을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 경무국 위생과에서 관리하였다는 것이다.
박승석이 종두인허원으로 등록된 것은 조선총독부 관보 1913년 4월 14일자 기사에 소개되어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13년 3월 8일부로 등록번호 1765번으로서 종두인허원 경기도 대표로 등록이 되었다는 것인데 이러한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그의 활동범위는 경기도 권역 전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종두인허원 취득을 신호탄으로 그가 거주하고 있는 방골에서 우두법(牛痘法)을 실시한 것인데 이런 의미로 본다면 방골은 당시 연천에서 최초로 우두법(牛痘法)을 실시한 발상지(發祥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박승석이 방골에서 우두법(牛痘法)을 실시한 것을 시작으로 그 범위가 인근 동네를 거쳐서 연천 전역으로 보급된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활동의 결과로 그의 호칭은 “우두박생원(牛痘朴生員)”으로 알려지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흔히 생원의 호칭을 받기 위해서는 소과인 생원시에 정식으로 급제를 해야 하는데 그가 소과에 응시한 적은 없었기 때문에 당시 군민들이 우두시술(牛痘施術)을 통하여 군민들의 생명을 지켜준 점에 대한 고마운 마음에서 이런 호칭이 생긴 것으로 짐작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연천에서 우두법(牛痘法)을 널리 실시한 박승석이 필자가 오래전에 연천주민과의 인터뷰를 통하여 철원에서도 우두법(牛痘法)을 실시한 것을 확인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점은 철원에서 우두법(牛痘法)을 실시하였다면 같은 경계지역이라 할 수 있는 포천에서도 우두법(牛痘法)을 실시하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박승석이 포천에서 우두법을 실시하였다는 결정적인 근거가 발견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당시 경기도를 대표하는 종두인허원이었기 때문에 포천에서도 우두법(牛痘法)을 실시하였을 가능성은 있다고 본다.
한편 2010년 3월 연천에 거주하는 주민과 인터뷰를 하였는데 그는 1930년생으로서 6세가 되는 1935년에 박승석으로부터 직접 우두시술(牛痘施術)을 받은 사실을 증언하였다.
구체적으로 연천군 중면 삼곶리에서 우두시술(牛痘施術)을 받았다는 것인데 당시 박승석의 모습을 가마를 타고 종두가방을 소지한 것으로 증언하였다.
이러한 증언의 의미는 박승석으로부터 직접 우두접종(牛痘接種)을 받은 주민의 최초 증언이라는 측면에서 그 역사적인 의미가 크다고 볼 수 있다.
박승석이 1937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어느 덧 80년의 세월이 흘렀는데, 그러한 증언에 근거하여 볼 때 박승석은 71세가 되는 1935년까지 군민들의 생명수호를 위하여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하여 볼 때 박승석은 49세가 되는 1913년부터 71세가 되는 1935년까지 20년이상 종두인허원으로 활동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문제는 이러한 활동을 공식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기록이 현재 없다는 사실이다.
이와 관련하여 필자가 그동안 여러차례 국민신문고를 통하여 관련 기관에 민원을 신청한 결과 박승석의 행적을 비롯하여 종두인허원 관련기록이 없다는 회신을 받았다.
박승석은 1937년 12월 28일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 비통하게도 그의 별세(別世)이후 종두인허원 경기도 대표로서 20년이상 활동한 업적이 역사속에 오랜 세월 묻혀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제 돌아 오는 2015년은 박승석의 탄생 15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가 되는데 이러한 해를 앞둔 시점에서 의학자(醫學者) 박승석을 애절한 심정으로 추모하며, 당시 군민들의 생명수호를 위하여 혼신의 힘을 기울였던 그의 봉사정신(奉仕精神)이 우리 사회에 널리 전파되기를 바란다.
박관우 / pgu77@naver.com 역사작가, 칼럼니스트, <역사 속에 묻힌 인물들>의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