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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용 칼럼] 떡잎부터 달랐던 불멸의 선비


이희용 기자 / heeyeong1@hanmail.net입력 : 2014년 09월 29일
↑↑ 이희용 철학박사, 포천신문 자문위원
ⓒ (주)포천신문사
경기도 출신으로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많은 저서를 남긴 학자는 다산 정약용이다. 그는 1762년(영조 38년) 6월 16일, 경기도 광주 마현리(현재 남양주시 조안면 마현리) 에서 진주 목사 정제원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어렸을 때 집에서 처음 부른 이름은 귀농이었다.

이는 부친이 벼슬을 버리고 농촌으로 돌아와 낳은 아들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성장하여 정약용의 호는 다산이라 하였으며 지금의 남양주 조안면 마현리가 어린 귀농(정약용)의 마음을 가꾼 고향이었다.

 정약용이 자란 마을 앞에는 한강이 흘렀고 동쪽에는 남한강과 북한강 물이 합쳐지고, 이 물줄기는 마재 마을을 휘돌아 서쪽에 있는 팔당을 거쳐 한양으로 흘러갔다. 어린 정약용이 보기에 한강은 매우 컸고 넓은 모래밭과 긴 강줄기가 마을과 산을 휘돌아 쳤다.

 약용은 늘 강가에 나가 개구쟁이 친구들과 함께 놀았고 흘러드는 작은 개울에서 친구들과 멱을 감고 고기도 잡았으며 달리기와 씨름도 하였다. 또한 비석치기를 하거나 탑을 쌓기도 하며 놀았지만, 그 속에서 놀지만 않고 형들이 아버지로부터 글공부 배우는 것을 보고 샘이 나서 어깨 너머로 따라서 배우고는 했다. 

그는 서툴지만 붓을 들고 글자 쓰는 것도 흉내 내었는데, 약용이 글씨 연습하는 것을 보고 아버지는 큰형인 약현 둘째형 약전 셋째형 약종과 함께 약용에게도 글을 가르쳤고 그래서 일곱 살이 되자 제법 한문으로 시를 지을 수 있었다. 

철이 들어 차츰 책을 가까이 하며 노는 것보다 집에서 책을 읽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그 때에 아버지는 다시 벼슬길에 나가에 되었는데 경기도 연천 현감으로 부임 받아 식구들과 함께 부임지로 떠나가게 되었다. 

강에서 모래 장난을 하던 정약용은 아버지가 손님들과 시회를 열고 있는 것도 모르고 집으로 달려오게 되는데 정약용은 금방 어른들이 시를 짓고 있던 벼루 가장자리에 둔 붓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한 선비가 그의 모습이 가상하여 약용에게 우리들도 시회를 열었으니 여기서 시한 수 지어보라 했다.

그러자 그는 서슴없이 종이를 끌어당기고 서슴없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의 시가 이러했다.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니(小山蔽大山), 거리의 멀고 가까운 이치로다(遠近地不同).” 이시를 지었을 때 그의 나이는 겨우 일곱 살 이었기에 보고 있던  모두들 감탄하게 하였다. 그날부터 그는 더 열심히 책을 읽고 글씨를 쓰며 자기가 읽은 글을 큰 소리로 외워 보기도 하였다.

정약용이 아홉 살 되던 해 가을 병석에 누워 계시던 어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해 아버지는 벼슬에서 물러났으며, 가족은 다시 마재로 돌아왔다. 어머니 생각이 날 때면 말없이 시를 지었는데 열 살이 되자 꽤 많은 시가 모였다. 아버지께서 약용이 지은 시들을 모아 한 권의 시집을 만들어 이름을 지으려 하였다. 

이때 큰 아들 약현이 '삼미집'이라고 하자고 부친에게 제안하였다. 그 연유는 약용이 천연두를 앓아 눈썹이 몇 개 없는 것처럼 보였기에, 이를 상징적으로 말하여 눈썹이 세 개밖에 없다는 뜻으로 '삼미'라고 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삼미집'을 읽어 본 사람들은 조선에도 중국의 두보나 이태백만큼 훌륭한 시인이 나왔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책읽기를 좋아하던 정약용은 외할머니 댁으로 책을 빌리러 다녔다. 그의 외가는 조선조 유명한 학자이며 시인이었던 윤선도의 후손이었기에 서가에 보유한 책이 대단히 많았다. 그래서 정약용은 방대한 책을 접할 수 있었고 나이가 먹을수록 보고 싶은 책도 많았다.

어느 날 정약용은 다 읽은 책을 나귀 등에 싣고 외가에 돌려주러 가는 길에서 이서구라는 사람을 만났다. 이서구는 당시 시에 능했던 이덕무·유득공·박제가와 함께 4가시인(四家詩人)의 한 사람으로 본관은 전주이고 자는 낙서(洛瑞) 호는 척재(惕齋) 강산(薑山) 소완정으로 벼슬은 사관을 거쳐 호조 판서, 대제학, 우의정에 이르렀던 대학자였고 말년을 포천에서 지냈으며 여러 가지 일화를 남긴 인물이다.

 며칠 전에도 책을 나귀에 싣고 갔는데, 책을 좋아하는 것을 보니 장차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한 이서구가 정약용을 불러 세웠다. 그리고는 정약용이 가지고 있던 책 몇 권을 빼서 그 내용을 이것저것 물어 보았다. 헌데 놀랍게도 정약용은 막힘없이 모두 대답하니, 당시 큰 학자였던 강산 이서구는 놀라지 아니할 수 없었다.

이렇게 독서를 많이 했던 정약용은 어려서부터 그 총기가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정조의 총애를 받아 수원성 축조와 배다리건설 등으로 수많은 업적을 남기기도 했지만, 형제들의 천주교 연루로 인한 시련이 닥쳐서 18년 동안 유배를 가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일생에 쓴 책은 500권이 넘으며 지은 시도 2,460여 편이나 되어 아직도 그 학문의 깊이를 계속 연구하고 있으니, 정약용은 과연 불멸의 선비라 칭할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할 것이다.

이 희 용
철학박사, 경북중학교 운영위원장, 문화평론가, 한국스카우트경기북부연맹 이사, 전경기도예총 부회장, 포천신문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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