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은 윤달이 들어있는 윤년(閏年)이다. 예로부터 우리 선조(先祖)들은 윤년에 산역(山役)을 하거나 비석(碑石) 같은 것을 세우곤 했다. 윤년에 이 같은 일을 하면 탈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산역을 할 때 호석(護石)과 비석을 함께 세우기도 한다. 그런데 비석은 무엇이고 표석은 무엇인가? 혹자는 말한다. ‘비석은 벼슬을 했거나 행적(行蹟)이 뚜렸한 사람들의 관명(官名)이나 공적(功績)을 새긴 것이고 표석은 벼슬 같은 것을 하지 못한 일반 사람들의 이름을 새긴 것이다.’ 이처럼 옛날의 비석이나 그릇 또는 쇠붙이 같은 것에 새겨진 글자를 금석문자(金石文字)라 부른다.
예전에는 비석을 세울 때 법도(法度)와 格式(格式)을 따라야 했다. 관등(官等)에 따라 비석의 형태가 달랐고 머릿돌과 밭침돌이 달랐다. 지금은 아무나 용두(龍頭)를 얹거나 귀부(龜趺)를 앉히지만 예전에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비석 말고 또 신도비(神道碑)라는 것이 있다. 신도비란 지난날 종이픔(從二品) 이상 벼슬아치의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우던 비를 말한다. 돈이 있다고 해서 아무나 신도비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법도에 맞아야 하는 것이다. 종이품 이상 벼슬을 해야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신도비를 세운 집안이라면 그만큼 행세깨나 했다는 말이다. 관등은 물론 그만큼 덕망(德望)이 높아야 세울 수 있었다.
송덕비(頌德碑)라는 것도 있다. 송덕비란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석을 말한다. 옛날 고을 수령(首領)들이 직(職)을 마치고 떠날 때 흔히 세웠던 비석이다. 물론 송덕비가 설만해서 세워졌을 것이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 그런데 과연 그랬을까? 역사를 보면 일본은 죽어서 송덕비가 섰고 우리나라는 살아 생전에 송덕비가 섰다. 거기서 우리가 진 것이다. 제도(制度)는 비슷했다. 운영(運營)에서 갈렸다. 우리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이었고 일본은 무농공상(武農工商)이었다. 우리는 신문고(申聞鼓)제도가 있었고 일본은 직소(直訴)제도가 있었다. 직소란 일정한 절차(節次)를 밟지 않고 윗사람이나 상급 관청에 직접 호소하는 것이다.
우리는 상소(上訴)나 신문고를 접하면 잘잘못을 가려 소원수리(訴願受理) 후 잘못한 자를 벌주거나 귀양보냈다. 일본은 달랐다. 일본은 소원수리 후 소(訴)를 발한 사람이나 소를 당한 사람을 모두 처형(處刑)했다. 그래서 소를 제기하려면 자기 목을 걸고 해야 했다. 우리는 세상이 바뀌면 당한 쪽에서 또 소를 제기해 또 벌 받고 귀양가곤 했다. 악순환(惡循環)의 연속이었다. 일본은 목숨을 바친 후에 공덕비가 섰다. 사후(死後)에 마을 사람들이 공덕비를 세워줬던 것이다. 우리는 살아서 공덕비가 섰다. 수령의 위세(威勢)에 눌려 그리 했던 것이다. 일본엔 무고(誣告)라는 것이 없었다. 자신의 목을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고가 얼마나 많은가? 아니면 말고 식으로 생각하니 너도 나도 가리지 않고 남을 헐뜯는 것이다. 비방(誹謗)하는 것이다. 아무도 자신이 한 말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 나라가 어찌되건 민생이 어찌되건 상관 않는다. 자신의 이득만 생각한다. 이래서는 안 된다. 살아서 공덕비를 세우는 수령이나 당파싸움으로 날을 지새우다가 세비만 챙겨가는 의원님들이나 뭐가 다른가? 승묵(繩墨)과 준승(準繩)의 의미을 생각해야 한다. 모범(模範)을 보여야 한다. 그리고 역사애서 배워야 한다.
한명회(韓明澮)가 어찌 되었는가?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 ‘나는 새도 떨군다’는 일국의 최고 재상(宰相) 영의정(領議政)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사후에 부관참시(剖棺斬屍) 당하지 않았는가.어찌 해야 하는가? 자신의 민낯을 ‘역사의 거울’에 비춰 봐야 한다. 그리고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양심(良心)의 소리’에 귀기울여야 한다. 졸부(猝富)들의 행태를 따라가서는 안 된다. 사후 어떻게 평가받을 것인가 곰곰 생각해야 한다. 자신의 행적을 새긴 글이 비석으로 추앙(推仰)될지 아니면 표석으로 비하(卑下)될지 스스로 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