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과 초정 박제가의 종두법(種痘法)을 계승하여 인두법(人痘法)을 실시함으로써 수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하였던 포천 출신 의관(醫官) 이종인이 1817년(순조 17년) 두창(痘瘡)과 종두법(種痘法)에 관련된 전문의서인 시종통편(時種通編)을 간행한 이후 그 행적이 역사속에 잊혀진지 어느 덧 200년의 세월이 흘렀다.
포천신문 2014년 9월 16일자 [‘잊혀진 의원(醫員)’포천 출신 이종인을 말한다] 제하의 칼럼이 게재된 이후 이종인과 관련된 중요한 정보를 알게 되었는데, 1821년(순조 21년) 진위현령(振威縣令)을 지낸 인물 중에서 이종인이 있다는 것이었다.
조선후기 실학자 오주 이규경이 저술한 백과사전류의 책이라 할 수 있는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종두변증설(種痘辨證說)’편에 이종인에 대하여 의관(醫官)으로 관직이 지현(知縣)에 이르렀다고 소개되어 있다.
이와 관련하여 여기에 등장하는 지현(知縣)은 현감(縣監)이나 현령(縣令)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조선시대 지방관직 제도에 있어서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을 비교하여 보기로 하자.
공통적으로 수령(首領)이라 불리어졌는데 그 품계에 있어서 군수(郡守)는 종4품 현령(縣令)은 종5품 현감(縣監)은 종6품의 품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중에서 현령(縣令)은 비교적 규모가 큰 현의 수령(首領)을 의미하였으며, 이에 반하여 현감(縣監)은 규모가 작은 현의 수령(首領)을 의미하였다.
진위현령(振威縣令)과 관련된 정보를 바탕으로 평택문화원에 문의를 하였는데 이종인이라는 인물이 1821년(순조 21년)~1823년(순조 23년) 진위현령(振威縣令)으로 재임한 기록이 있다는 답변을 받았다.
그렇다면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진위현령(振威縣令)으로 3년간 재임하였던 이종인이 인두법(人痘法)을 실시하였던 이종인과 동일인물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가능성은 있다고 본다.
그러한 근거는 이종인의 행적이 끊어진 것이 1817년 이후라 할 수 있는데 진위현령(振威縣令)으로 재임하였다고 하는 이종인이 부임한 시기가 1821년(순조 21년)이라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시기적으로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점을 주목한다.
아울러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이종인의 관직이 지현(知顯)에 이르렀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진위현령(振威縣令) 이종인과 포천 출신 의관(醫官) 이종인이 동인인물일 가능성이 있지만 이와 반대로 동일인명이 아닐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본다.
필자가 포천신문 2014년 9월 16일자 칼럼에서 이종인을 의원(醫員)으로 소개하였는데 본 칼럼에서는 의관(醫官)으로 소개하였다. 사실 기록마다 차이가 있는데 이번 기회에 의원(醫員)과 의관(醫官)의 차이에 대하여 설명하기로 한다.
의원(醫員)이란 한마디로 의업에 전문적으로 종사하는 것을 의미하며, 의관(醫官)이란 이러한 의업을 하면서도 동시에 관직을 가지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동안 이종인과 관련된 기록을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보면 의사(醫師)를 비롯하여 의원(醫員),의관(醫官)이라는 호칭을 썼는데 이제 본 칼럼부터 이종인의 호칭을 의관(醫官)으로 통일한다.
이와 더불어 이종인이 재임 후에 선정비(善政碑)가 세워졌다는 사실인데 여기서 선정비(善政碑)란 의미에 대하여 생각해 보기로 한다. 선정비(善政碑)란 재임중에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푼 관원을 칭송하고 그 고귀한 정신을 널리 알리는 차원에서 세운 비석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선정비(善政碑)는 진위현령(振威縣令) 이종인과 포천 출신 의관(醫官) 이종인이 동일인물인지 여부를 규명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는데 선정비(善政碑)가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제 이종인의 행적과 관련하여 추가로 알게 된 정보를 바탕으로 현재까지 조사한 그의 생애를 소개한다.
먼저 그의 본관은 전주로 알려져 있으며, 자는 수보(壽甫)이다. 그런데 그의 선친을 비롯하여 선대의 내력에 대하여는 전혀 알 수 없다는 점인데 현재까지 알려진 그의 유일한 가족은 이종원이라는 동생인데 시종통편(時種通編) 서문에 그 동생의 이름이 소개되어 있다.
한편 그의 출생연도는 알 수 없지만 여러 기록을 종합하여 볼 때 포천에서 출생한 것은 틀림없는 것으로 보이는데 한 가지 안타까운 대목은 그의 생가(生家)의 위치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가 어떤 계기로 의관(醫官)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젊은 시절 두창(痘瘡)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으며, 1798년(정조 22년) 영평현령(永平縣令)으로 재임하고 있던 초정의 관사(官舍)에서 최초로 종두에 관한 서적을 읽었으며, 그로부터 2년후인 1800년(정조 24년) 다산과 초정의 종두법(種痘法)을 계승하여 그 이후 인두법(人痘法)을 널리 실시하여 수많은 백성의 생명을 살렸다는 것이다.
1817년(순조 17년) 두창(痘瘡)과 종두법(種痘法)에 관련된 전문의서인 시종통편(時種通編)을 간행하였으며, 그 이후 1821년 진위현령으로 이종인이라는 인물이 부임하였는데 포천 출신 이종인과 동일인물인지 여부와 관련하여 가능성은 있어 보이지만 단정하기는 어렵다는 점이다.
이상과 같이 이종인의 생애를 간략히 정리하였는데 무엇보다도 1817년(순조 17년) 이후 200년 동안 잊혀져 있던 행적의 일부를 규명할 수 있는 단서가 발견된 것을 의미있는 진전으로 평가한다.
이제 이종인의 1817년 이후의 행적과는 별도로 이종인과 실학파의 관련성에 대하여 논하려고 한다.
최근에 실학박물관 홈피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거기에 실학자 리스트를 확인한 결과 이종인이 제외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종인의 스승이라 할 수 있는 다산과 초정은 당연히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조선후기 대표적인 실학자라 할 수 있는 다산과 초정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는 이종인이 왜 실학파에서 제외된 것일까?
이는 1817년 이후 이종인의 행적이 잊혀진 것과 더불어 미스터리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필자의 생각은 당시 실학의 거목(巨木)이라 할 수 있는 다산과 초정의 종두법(種痘法)을 계승한 이종인도 엄밀히 말하여 실학파에 분류될 수 있다고 보는데 실학자들의 정신을 이 세상에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는 실학박물관에 이종인의 존재감(存在感)은 없다는 것이다.
끝으로 이종인의 행적을 추적하는 문제와 더불어 필자의 증조부가 어떤 계기로 인하여 두창(痘瘡)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인지 이 부분에 대한 조사도 병행할 것이다.
박관우 / pgu77@naver.com 역사작가, 칼럼니스트, <역사 속에 묻힌 인물들>의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