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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우 역사칼럼] ‘잊혀진 의원(醫員)’ 포천 출신 이종인을 말한다


포천신문 기자 / ipcs21@hanmail.net입력 : 2014년 09월 16일
↑↑ 박관우 역사작가, 칼럼니스트
ⓒ (주)포천신문사
지금으로부터 200여 년 전인 1817년(순조 17년) 이종인이 두창(痘瘡)과 관련된 중국의서들을 참고하고 그동안의 임상경험을 바탕으로 두창(痘瘡)과 종두법 전문의서라 할 수 있는 시종통편(時種通編)을 저술하는 획기적인 업적을 남긴다.

그렇다면 시종통편(時種通編)의 저자인 이종인은 과연 역사 속에 어떤 흔적을 남긴 인물이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거슬러 올라가서 필자가 이종인에 대하여 최초로 알게 된 계기는 20여 년 전에 증조부인 박승석이 연천에서 우두시술을 하였다는 증언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이러한 증언을 들은 이후 증조부의 행적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이종인이 포천 출신으로서 초정 박제가로부터 종두법을 전수받은 이후 시종통편(時種通編)을 저술한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뒤돌아보면 당시는 증조부의 행적을 추적하는 초창기인지라 체계적으로 연구하지 못하였다고 본다.

그러다가 오랜 세월이 흘렀으며, 증조부 탄생 150주년을 앞둔 시점에서 심기일전(心機一轉)하여 증조부의 행적을 다시 조사하게 되었다.

증조부는 49세가 되는 1913년에 종두인허원 경기도 대표로 등록이 되었으며, 연천에서 최초로 우두법을 실시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근본적으로 증조부가 어떤 계기에 의하여 두창(痘瘡)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 그 출발점을 규명하는 과정에서 오랜 세월 필자의 뇌리에서 잊혀져 있던 이종인의 행적을 추적하게 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증조부가 1865년(고종 2년)생이니 시기적으로 볼 때 이종인보다 후대의 인물이라 볼 수 있지만 이종인이 거주한 것으로 알려진 포천이 연천의 경계지역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지역적인 영향으로 증조부가 이종인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짐작되는 것이다.

그동안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종인이 포천 출신임에는 틀림없는 것으로 보이나 정확히 언제 출생하였으며, 그 생가(生家)는 어디에 위치하였는지 이 부분이 전혀 파악이 안되고 있는 상황이다.

한 인물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출생한 해와 그 생가(生家)는 기본적인 정보라 할 수 있는데 이종인과 관련된 그런 정보를 알 수 없다는 점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이종인이 포천 출신의 의원으로만 알려져 있을 뿐 그의 행적에 대하여 자세히 알 수가 없다는 것인데 시종통편(時種通編) 서문에 의하면 그가 젊은 시절에 두창(痘瘡)에 대하여 관심이 있었다는 것이며, 1798년(정조 22년) 당시 영평현령으로 재임하고 있던 초정의 관사(官舍)에서 종두와 관련된 서적을 보았다는 대목이 그와 관련된 공식적인 첫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초정은 실학파중에서도 북학파 학자로 알려져 있으며, 당시 중국에도 여러번 다녀왔는데, 특히 1790년(정조 14년) 연경(燕京)에 사신으로 갔을 때 의종금감(醫種金鑑)이라는 중국의서를 구하여 이를 규장각에 보관하였으며, 그중에서 “유과종두심법요지(幼科種痘心法要旨)”부분만을 초록(抄錄)하여 소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와 더불어 조선의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로 유명한 다산 정약용도 이러한 종두법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인데, 1799년(정조 23년) 의주부윤으로 있던 이기양의 아들 총억 으로부터 의주인(義州人)이 연경으로부터 얻어 온 정씨종두방(鄭氏種痘方)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 책을 구하여 종두법 중 수묘법(垂苗法)을 터득하게 된다.

이듬해인 1800년(정조 24년) 다산은 초정을 만나 종두법에 대하여 토론하는 과정에서 초정이 의종금감(醫種金鑑)중에서 유과종두심법요지(幼科種痘心法要旨)를 초록(抄錄)한 사실을 알고 다산이 소장하고 있던 정씨종두방(鄭氏種痘方)의 내용을 합하여 종두심법요지(種痘心法要旨)를 완성하였다

여기에는 종두법을 실시하는 방법이 자세히 소개되어 있었는데, 초정이 이를 향리의 아들과 관노의 아들에게 실험하고 이어서 초정의 조카에게 실험한 결과 효험이 있는 것을 최종적으로 확인하고 이종인에게 마침내 종두법을 전수하였다.

그런데 초정이 이종인에게 종두법을 전수하여 주었지만 사실상 이것은 다산과 초정의 공동연구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초정으로부터 종두법을 전수받은 이종인은 우선 마을의 주민들에게 실험하여 성공을 거둔 이후 서울로 올라가 인두법을 실시하여 많은 백성들의 생명을 구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에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가 닥치니 그것은 1801년(순조 1년) 신유사옥(辛酉史獄)이 발생하여 그의 스승이라 할 수 있는 다산과 초정이 여기에 연루되어 귀양을 갔을 뿐만 아니라 이종인도 연루가 되어 귀양까지 간 것은 아니지만 심한 고초를 겪은 것으로 알려 졌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이종인이 그러한 위기를 극복하고 6년후인 1807년(순조 7년) 영남의 상주(尙州)를 시작으로 다시 인두법을 실시하여 시종통편(時種通編)을 저술하는 1817년(순조 17년)까지 계속 활동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안타깝게도 그 이후의 행적을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니 그가 언제 서거하였는지 여부도 알 수 없다는 점인데 필자가 그동안 조사해 본 결과 그 어떤 자료에도 그의 서거와 관련된 기록이 없었으며, 필자가 이 분야의 전문가에게 자문한 결과 1817년(순조 17년)이후의 그의 행적을 알 수 없다는 답변을 받은 바 있다.

그렇다면 근본적으로 조선후기 대표적인 실학자라 할 수 있는 다산과 초정의 종두법을 계승한 이종인의 행적을 왜 알 수 없는 것일까? 참으로 미스터리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결론적으로 조선에 인두법을 실시하여 많은 백성들의 생명을 구하였던 포천 출신의 의원 이종인이 200여년이 흐른 시점에서도 역사 속에 잊혀져 있는 현실에 비통한 심정을 금할 수가 없으며, 그의 숭고한 의술정신(醫術精神)이 우리 사회에 널리 알려지기를 바란다.

박관우 pgu77@naver.com / 역사작가, 칼럼니스트, <역사 속에 묻힌 인물들>의 저자
포천신문 기자 / ipcs21@hanmail.net입력 : 2014년 09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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