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말기 19세기 사회는 내적으로 정치·경제적으로 세도정치와 삼정문란으로 고통을 겪었고, 밖으로는 제국주의 외세의 약육강식과 같은 사회진화론적 침략과 도전을 방어하여야 했다. 이러한 시대상황 속에서 ‘심주리론(心主理論)’을 제창한 화서학파는 개화기 최초의 척사위정(斥邪衛正)학파로 자리 잡았다.
화서학파는 존왕양이와 척사위정사상을 바탕으로 의리실천운동을 전개하였다. 상소운동과 반외세 항일의병투쟁을 통하여 자주적 민족운동의 발전에 중요한 방향을 제시하였다. 또한 우리의 국권과 문화적 전통을 지키기 위해 강인한 저항정신으로 서구열강의 침략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였다.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92-1868)가 화서학파의 창시자라면, 김평묵(金平黙, 1819~1891)은 화서학파의 중흥을 이룩한 인물로 평가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항로의 심설(心說)을 지키고 발전시킴에 있어서 김평묵이 당한 고난과 높은 사상적 의지가 있었기에, 당시 국내외 급박한 사회정치적 현실에서도 화서학파는 여론의 지지를 받고 성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임헌회(任憲晦, 1811~1876)의 제자 전우(田愚, 1841~1893)가 화서학파의 심설과 출처(出處)를 문제 삼아 이항로의 ‘심주리설’을 양명학으로 규정하고, 이항로가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을 자파(自派)의 학문연원으로 주장한 것은 외부의 비판을 막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강한 비판을 하였다. 이로 인해 화서학파는 심각하고 치명적인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하지만 김평묵은 전우가 “송시열, 이항로 두 사람의 심설은 언뜻 들으면 정반대인 것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완전히 같은 것이며 ‘심주리설’을 불교의 ‘본심(本心)’이나 양명학의 ‘양지(良知)’ 개념에 비유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반박하였다. 그리고 송시열의 심설을 비판하는 방법을 지양하고 이항로의 ‘심주리설’이 양명학과 같다는 비판을 불식 시키는 데 중점을 두어, 스승인 이항로의 의도를 가장 충실하게 반영해 나갔다.
반면에 유중교는 「조보화서선생심설(調補華西先生心說)」을 주장하여 스승의 ‘심주리설’이 전통적 통설과 비교해 볼 때 ‘신(神)’의 해석에 있어서 분명한 차이가 있으므로, 이 부분을 수정해야 한다고 비판하여 학파내의 논쟁을 일으켰다. 유중교의 심주리설 수정의견에 대해 1888년 4월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은 유중교에게 편지를 보내 스승의 심설을 의심하는 것에 대해서 강하게 비판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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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직 학계에 발표된 바는 없지만, 이항로의 제자이면서 김평묵의 제자였던 유기일(柳基一, 1845-1904)은 유중교가 스승의 심설에 대해 조보논쟁을 벌였을 때, “화서는 나의 부사(父師)이고 성재(省齋;유중교)는 나의 형사(兄師)이니, 부사가 무함(誣陷)을 당하면 형사는 걱정할 겨를이 없다.”고 하면서 강하게 비판하였다. 끝내 유기일은 유중교의 행위를 ‘사문난적’으로 취급하였다.
결국 ‘화서심설조보논쟁’은 1893년 12월 유중교가 죽기 전날 자신의 제자들에게 그가 작성한 ‘「정안(正案)」을 환수하여 다시금 사람들의 안목을 가리지 말 것’을 유언함으로써 마무리 되었다.
화서학파가 척사위정사상과 그 실천운동의 정맥으로 자리할 수 있던 것은, 이항로의 사후에 그 실현을 위한 김평묵의 적극적이고 확고한 심설논쟁과 최익현의 실천운동 그리고 유기일 등 화서학파 문인들의 적극적인 현실참여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또한 유기일은 1895년 을미개혁으로 일본인이 국정을 농락하자 부친에 이어 출처에 분명하여 출사하지 않았다. 특히 「병자연명유소」 때에는 소수에 추천되기도 했으며, 전우나 유중교와의 심설논쟁에서는 철저하게 김평묵을 지지했다. 그리고 서양의 학문은 오히려 이적(夷狄)보다 못하다고 인식했던 스승 이항로의 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여 충실하게 계승하였다.
19세기 제국주의 개항의 압력과 외세의 침탈에 저항하며 우리의 정체성을 지켜나간 포천출신의 화서학파 김평묵·최익현·유기일 세 명의 유학자가 보여준 의리실천사상은 우리나라 정통사상과 민족주의를 실현한 것으로 평가하기에 족하다. 그리고 척사위정사상은 일제에 의해 국권이 상실되었을 때에는 독립운동사상으로 이어져 우리의 정체성을 지키는 구심점으로 되었다.
요컨대, 국난의 시기에 외세에 항거한 구국운동과 의병투쟁의 핵심인 화서학파의 척사위정과 의리실천사상은 우리 자주적인 국권수호와 민족자존을 위해 올바른 전통사상으로서의 위상을 재조명하고 마땅히 계승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