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예의(禮義) 없는 사람 혹은 염치(廉恥) 불구하고’라는 말을 흔히 한다. 예의가 없다는 것은 처신(處身)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이고 염치가 없다는 것은 부끄러움을 모른다는 것이다. 예의와 염치라는 말을 사유(四維)라고 한다. 사유란 네 가지 유(維)를 가리키는 것이다. 유(維)란 벼리인데 이 경우 뼈대란 뜻으로 사용된다. 관자(管子)는 ‘목민(牧民)’편에서 나라에는 네 벼리(四維)가 있는데 한 벼리가 끊어지면 기울고 두 벼리가 끊어지면 위태하고 세 벼리가 끊어지면 멸절(滅絶)된다고 말했다.
그는 사유에 대해 첫째가 예(禮)이고 둘째가 의(義)이며 셋째가 염(廉)이고 넷째가 치(恥)라 하면서 이를 예의염치(禮義廉恥)로 요약했다. 예란 절도를 넘지 않는 것(不踰節)이고, 의란 스스로 나아가지 않는 것(不自進)이고, 염은 악을 감추지 않는 것(不蔽惡)이며, 치는 굽은 것을 쫓지 않는 것(不從枉)이다. 여기서 스스로 나아가지 않는 의(義)는 벼슬하기 위해 갖은 수단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조선의 상소문(上疏文)에는 ‘사유가 없으면 나라가 아니다’ 또는 ‘사유가 없으면 사람이라 할 수 없다’는 뜻을 담은 구절이 많다. 예의염치는 특히 벼슬아치들에게 강조되었다. 성종 1년(1470)에 대사헌 한치형(韓致亨)이 “사람을 쓸 때는 차라리 어리석은 이를 쓸지언정 탐(貪)하는 이를 쓰지 않으니 처음부터 사유(四維)를 우선하지 않음이 없었고 비록 백 사람의 재주를 겸했다고 하더라도 염치가 한 번 무너지면 다른 것은 볼 것도 없습니다”라고 상소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사람이라면 수치(羞恥)를 알아야 한다. 수치에서 羞는 양의 뜻인 羊과 손의 의미인 丑(又의 변형)의 합자이다. 양고기를 손에 들고 바친다는 데서 맛있는 음식을 뜻하고 음식을 받는 사람이 감사의 뜻을 표할 때 수줍어한다는 데서 ‘부끄러워하다’라는 뜻이다. 한 마디로 ‘창피하고 부끄럽다’는 것이다. 바야흐로 직업윤리와 도덕성 회복을 위한 우리 모두의 통렬한 자성(自省)이 필요한 때이다. 그렇더라도 지나친 자조(自嘲)나 자학(自虐)은 금물이다.
물론 자성은 필요하다. 성찰(省察)은 필요하다. ‘바르게’보다 ‘빠르게’를 앞세운 우리 사회 전반의 문화와 의식(意識)을 겸허한 마음으로 성찰해야 한다. 이 같은 안전 불감증이 오늘의 사태를 불러 온 배경이라는 사실을 절감(切感)해야 한다. 한편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이 근대 세계 역사상 가장 괄목(刮目)할 절대 빈곤의 탈출과 경제 부흥을 일궈낸 역동적(力動的) 힘의 근원이기도 하다는 사실도 받아들여야 한다.
물론 리스크 관리가 필요하다. 리스크 관리가 기업 성패를 가르듯 거시적 위험 관리는 국가의 흥망(興亡)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리스크는 최소화하고 수익은 극대화하는 방안을 강구(講究)해야 한다. 국민안전의 위험 요소를 철저히 줄이는 동시에 성장 잠재력을 최대한 키워나가는 방법을 모색(摸索)해야 한다. 이것이 국가 대계(大計)를 위한 바른길이다. 사(私)를 버리고 공(公을) 생각해야 한다. 당(黨)을 버리고 나라(國)를 생각해야 한다. 윈윈하는 방법을 찾아나서야 한다.
도유우불(都兪吁咈)이란 말이 있다. 요임금과 순임금이 신하들과 정사를 토론할 때 찬성과 반대 의견을 거리낌 없이 펼치고 허물없이 받아 들였던 일을 두고 하는 말이다. 도(都)는 찬미의 뜻이고 유(兪)는 동의하여 호응하는 표현이다. 우(吁)는 생각이 다를 때 불(咈)은 반대의 뜻을 나타낼 때 쓴다. 임금의 말이 옳으면 적극적으로 찬동하고 아니라고 생각되면 솔직하게 반대의 뜻을 밝혔다. 그러면 임금은 순수한 마음으로 그 말에 귀를 기울였다. 후대에 이 말은 밝은 임금과 어진 신하가 뜻이 맞아 정사(政事)를 토론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오늘날 선량(選良)이라고 하는 사람들이나 위정자(爲政者)들이 새겨들어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