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가쟁명(百家爭鳴)이란 말이 있다. 많은 학자나 논객이 거리낌 없이 자유로이 논쟁(論爭)하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이를 다른 말로 백화제방(百花齊放)이라고도 한다. 많은 꽃이 한꺼번에 피듯이 갖가지 학문이나 사상이 개방적(開放的)으로 일시에 표출됨을 빗대어하는 말이다. 요즘 신문이나 방송을 보면 백화제방이나 백가쟁명이란 말이 저절로 떠오름을 금할 수 없다. 문제는 사이비(似而非)들이 난무하고 있다는 데 있다. 어지럽게 춤추는 데 있다. 사이비란 겉으로는 그것과 같아 보이나 실제로는 전혀 다르거나 아닌 것을 말한다.
조언(助言)과 조언(造言)을 떠올리는 이유이다. 助言은 도움말이다. 곁에서 말을 거들거나 일깨워주는 행위나 그 말을 말한다. 造言은 지어낸 말이다. 터무니없는 사실을 꾸미어 하는 말이다. 백가쟁명이 떠들어 대는 말이 助言일 수도 있고 造言일 수도 있다. 사실(事實)일 수도 있고 허위(虛僞)일 수도 있다. 그래서 햇갈린다. 사실이 곧 진실은 아니다. 그들이 하는 말이 사실일 수는 있어도 그것이 모두 진실은 아니다.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저널리즘의 도움을 받는 이유이다. 사실을 진실로 규명(糾明)해 가는 과정이 저널리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론마저 사실과 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덩달아 춤을 춘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助言과 造言을 구분하지 못하고 떠들어 댄다면 어찌 되겠는가? 기자는 냉철(冷徹)해야 한다. 그리고 선구자(先驅者)의 길을 가야 한다. 사명감(使命感)을 가져야 한다. 기자는 행동의 세계(fact)와 전문가의 세계(authority)와 일반 대중(mass)을 연결하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직업의 하나라는 사실을 통감(痛感)해야 한다. 물론 홱트(fact)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그 이면(裏面)을 추적해야 한다. 전문가의 안목(眼目)으로 원인(原因)을 규명해야 한다. 그리고 진실(眞實)을 가려내야 한다. 사실(事實)의 언어와 신념(信念)의 언어를 가려내야 한다.
신념의 언어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외눈박이의 언어를 말하는 것이고 사실의 언어란 있는 그대로 세상을 보는 관찰자(觀察者)의 언어를 말하는 것이다. 지금은 신념의 언어가 넘치고 사실의 언어가 부족한 시대이다. 신념의 언어는 사실의 한쪽만 보는 데서 시작된다. 한쪽 사실만 보면서 신념을 쌓게 되면 다른 쪽은 아예 안 보고 싶게 된다. 다른 쪽 사실 앞에 분노가 치미는 감정적 단계까지 가게 되면 신념의 언어는 파괴성(破壞性)을 드러낸다. 반면 사실의 언어는 견고(堅固)하다. 누가 보더라도 어쩔 수 없는 엄연(儼然)한 현실에서 사실의 언어는 출발하기 때문이다.
어찌해야 하는가? 제자 공손추가 맹자에게 물었다. “선생님의 장점은 무엇입니까?” 맹자가 대답했다. “내 장점은 말을 알고 내 호연지기를 잘 기르는 것이다.” 공손추가 다시 묻는다. “말을 안다는 게 어떤 건가요?” “한 쪽으로 치우친 말(?辭)을 들으면 가려진 것을 알고, 방탕한 말(淫辭)에서 빠져 있음을 알며, 사특한 말(邪辭)을 듣고는 도리를 벗어났음을 알고, 회비하는 말(遁辭)에서 궁함을 알아보는 것이지. 이런 마음이 생겨나 정치를 해치고, 정치에 펴서, 일을 망치는 법이다. 성인께서 다시 나오셔도 반드시 내 말에 동의하실 게다.” 助言과 造言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助言과 造言을 구분할 줄 안다는 것은 말귀를 잘 알아듣는 다는 것이다. 말귀를 잘 알아들어야 한다. 누구나 그럴 법하게 보이려고 꾸미고 보탠다. 얼핏 들으면 다 옳은 말이고 전부 충정(衷情)에서 나온 얘기다. 안 될 일이 없고 해결 못할 문제가 없다. 찬찬히 보면 다르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피사가 있고 외곬에 빠져 판단을 잃은 음사가 있다. 바른 길을 벗어난 사사가 있고 궁한 나머지 책임을 벗으려고 돌려막는 둔사가 있다. 이 피음사둔(?淫邪遁)의 반지르르한 말을 잘 간파해서 본질을 꿰뚫어 보는 맹자의 안목이 절실한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