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이란 정보의 이기가 주지 못하는 책의 즐거움을 나는 최근에 깊이 절감했다. 스티븐 그린블랫이 쓴 『1417년, 근대의 탄생』은 종이책이 줄 수 있는 즐거움과 유익함을 절감케 해주었다.
현재 하버드대 영문학과 교수인 스티븐 그린블랫이 이 책의 저자로, 포조 브라촐리니라는 중세 이태리의 책 사냥꾼이 기원전 1세기의 인문학자이자 시인이었던 루크레티우스가 쓴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책을 발견하고 그것이 세상에 전해지기까지의 과정을 밝힌 것이다. 이처럼 요약해 버리면 이 책이 퓰리처상 논픽션 부문과 전미국도서상 논픽션 부문 수상작이 된 이유를 알 수 없다. 1400년대의 로마 교황청에서 비서로 일하던 포조 브라촐리니가 책을 엄청나게 좋아하여 이태리와 독일까지를 헤매며 그 당시 책의 수장고였던 수도원의 도서관들을 찾아다녔던 사연도 이 책의 가치를 입증하지는 못한다.
내가 보기에 이 책의 가치는 포조 브라촐리니와 루크레티우스라는 뛰어난 인문주의자들을 발굴해 낸 것 외에도 이 책이 너무도 생생하게 유럽 중세 또는 고대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포조가 살던 15세기 로마와 교황이 거하던 교황청의 실상이 너무나 생생하게 묘사되고 있어 이 책의 저자가 당대를 실증하기 위하여 얼마만한 열정과 노력을 바쳤는지를 족히 짐작케 한다.
중세의 교황 또는 교황청이 신의 영광과 섭리와는 얼마나 멀리 떨어져 세속적 이익과 환락을 추구하고 타락과 부패를 일삼았는지를 이 책은 낱낱이 증거 한다. 루터의 종교 개혁 이전에 이미 면죄부 판매, 독선과 수뢰, 권모술수, 성적 문란을 공공연히 저질렀던 교황청의 모습이나 이를 바로잡기 위하여 나섰던 후스, 히에로니무스 같은 개혁가들이 잔혹하게 당한 화형의 실상, 종교적 도그마를 과학으로 대체하려다 화형당한 조르다노 브루노의 비극적 생애는 중세가 얼마나 어두웠던 시대인가를 생생하게 드러낸다. 그러면서 루크레티우스가 살았던 시대 이후 중세인들이 책과 지적 토론을 즐기는 인문적 전통에 얼마나 충실했던 가도 잘 보여준다.
포조 브라촐리니라는 인물은 호학(好學)과 호문(好文)에 충실했던 중세의 지적 전통 가운데서 살펴야 할 인물이다. 포조는 뛰어난 필사능력을 가진 서기로, 온갖 술수와 비리가 넘치는 교황청에서 교묘한 처세로 무려 8명의 교황을 보좌한 인물이면서도 표리부동한 교황청의 천박한 실태에 늘 회의를 느끼고 책과 인문학을 파고든 모순적 인물이다. 한때 교황청에서 실각하였을 때 그는 이태리는 물론 독일까지를 헤매면서 고서들을 찾아 다녔는데 이때 독일의 한 수도원에서 그가 발굴한 것이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였던 것이다. 고전을 애호하고 그 속에 담긴 세계를 사랑했던 그의 발굴이 유럽의 근대를 추동한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은 그도 몰랐던 일이다.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는 우주와 인간의 삶에 대한 첨예한 사유를 시로 기술한 것인데 B.C 300년 경을 살았던 에피큐로스 철학에 사유의 바탕을 둔 작품이다. 흔히 쾌락주의로 알려진 에피큐로스 사상은 삶의 유한성을 자각하고 그 유한한 삶을 철저히 즐기자는 것이 핵심이다. 그러나 그 쾌락은 소박하고 단순한 생활 가운데서 오는 절제되고 지적인 것이었으나 엄숙주의를 고수해야만 하는 중세의 카톨릭 교회로부터 철저히 배척되었다. 루크레티우스의 시편도 그리하여 포조에게 발견된 이후 암암리에 당대의 지식인들에게 전파되어 결국 르네상스의 추동력이 된 것으로 스티븐 그린블랫은 서술한다.
루크레티우스의 시편은 B.C 1세기에 지어진 것치고는 참으로 첨단적인 사고가 많이 내포되어 있다. 우주는 신의 창조가 아니라 원자(atom)로 이루어진 것, 그 원자로 된 사물의 중심은 진공이라는 것, 사후세계는 없다는 것, 인간은 이 우주에서 특권적인 지위를 가지지 못한 하잘 것 없는 생명체 중 하나라는 것, 세상은 우연성(이 책의 표현으로는 일탈)으로 충만하다는 것 등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는 첨예한 사고들이 그의 시에는 담겨있다.
이 중에서도 흥미로운 것은 그의 사상이 노장사상과 매우 유사한 점이 있다는 것이다. 원자로 이루어진 사물의 중심이 텅 비어있다는 것이 그것인데 이는 도(道)란 태허(太虛) ― 텅빈 것이라고 본 노장사상과 일맥상통한다. 그러고 보면 삶의 유한성을 자각하고 이를 최대한 즐겨야 한다고 본 쾌락주의도 자연과 일체가 되어 삶을 누려야 한다고 본 무위자연설(無爲自然說)과 일치한다.
참으로 진리란 동서양을 막론하고 서로 통하는 것이란 점을 이런 경우에도 발견케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가 경탄한 것은 중세의 시공간을 낱낱이 묘사하고 당대의 풍습과 삶의 실상을 재현해 낸 그린블랫의 끈질긴 탐구력과 필력이다. 서구 세계 전체를 관통하는 지성사와 전통을 규명해 낸 저자의 공력이 부럽고 같은 학자로서 한편으로 부끄럽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