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상 가장 많은 저서를 남겼다는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가와 묘소가 가까운 곳에 있는데도 좀처럼 찾아가지 못하다가, 모처럼 시간을 내어 그동안의 답답하고 복잡하던 일상을 잠시 조선을 대표하는 학자의 곁을 찾기로 했다.
다산 선생의 유적지가 있는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는 말을 타고 일을 하러 광주로 넘어가던 고개라 하여 마현이라 부르기도 하였고, 청주한씨 서원부원군의 묘소가 있어 원릉이라 불렸다고 한다.
북한강변을 지나며 오른쪽으로 길게 휘어감은 강줄기가 예사롭지 않아 보였고, 삼천리 한반도의 중심을 가로질러 흐르는 모습은 빈손으로 왔다 소리 없이 사라져간 우리민족의 역사를 묵묵히 쓸어 담고 유유히 흘러가고 있으니, 세월의 강인함에 시공을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민족의 정기인 백두대간이 흘러내린 마지막 언저리에 들국화마저 말라버린 조그만 산등성이가, 골짜기를 굽이쳐 평지를 모은 곳에 다산 정약용 선생의 생가는 고즈넉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입구를 들어서니 왼편에는 다산문화관이 있었고 주변으로 문화의 거리가 자리했고, 양옆에는 목민심서를 비롯한 선생이 저술하신 책들을 소재로 당연하게 자리 잡은 조각상들이 있었다.
문화관에는 선생의 업적에 관한 많은 자료들이 단아하게 정리하였고, 이곳을 한 바퀴 천천히 둘러보고 곧바로 다산 생가로 들어갔는데, 당호는 여유당(與猶堂)이었는데, 원래 있었던 건물이 오래전 홍수에 떠내려가 1975년과 1986년에 복원되어 "ㄴ" 자 두개를 포갠 "ㅁ" 자 형태의 팔작지붕 민 도리 집으로 지어져 있었다.
안채와 사랑채를 구분하여 사랑채엔 손님을 접대하던 방과 잠을 자던 방, 바깥쪽으로는 하인들이 쓰던 방과 안채엔 침실이 있으며, 그 사이에 마루가 있고 스무 칸 생가의 오른쪽에는 사당이 있고, 왼쪽에는 생전의 유품을 수집 정리한 전시관이 있었다. 그렇게 다산의 생가는 제법 널찍한 터를 잡고 우직하게 버티고 있었다.
생가 뜰에서 제일 먼저 만날 수 있는 것은 다산 정약용 상이었는데. 그의 단아한 자태와 차분한 얼굴 표정에서 백성들을 긍휼히 여기는 다산선생의 마음을 볼 수 있었다.
정조의 총애를 받아 조선을 대표하는 위대한 사상가로 출중한 실력을 가졌음에도, 그 뜻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18년 동안 강진에서 귀양살이를 하였고, 유배지인 강진에서 지인의 도움으로 다산이라는 산 밑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는데, 그 산의 이름을 따서 자신의 호를 다산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그 억울하고 참혹했던 유배지에서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무엇인가를 남기고 죽어야 한다고 마음속으로 다짐을 하며, 귀양살이를 헛되이 보내지 않고 책을 써야겠다고 결심하고, 백성들을 다스리는 벼슬아치들에게 필요한 책과 정치와 경제에 관한 자기의 생각도 글로 적었으며, 지방관의 지침서가 되었다는 목민심서 48권을 썼으며, 일생동안 쓰신 저서가 500권이 넘으며 지은 시가 2,460편이나 된다고 한다.
18년의 긴 유배에서 돌아온 다산선생이 자신을 둘러싼 세상의 기운이 심상치 않음을 알고, 사방을 두려워하고 조심스럽게 살아가고자 하는 의미로 여유당이라는 당호를 지었다고 하니 그분의 삼가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경건한 마음으로 뒷동산에 올라 한강을 내려다보는 자리에 모셔진 선생의 묘소에 참배하고 내려와 문을 나서니 앞쪽에 실학박물관이 있어 발걸음을 옮겼다. 거기에는 각종 책자와 애니메이션으로 소개되는 실학자의 피범벅이 된 생애를 보면서, 복잡하기만 했던 마음이 눈 녹듯이 녹아내렸다.
부산함을 털고 발길을 옮기니 서쪽을 물들이는 석양을 따라 우리역사상 최고의 문인이며 사상가였던 선생의 거룩한 선비정신이 떠올라 옷깃이 여미어졌고, 아른거리는 일몰 뒤에는 그분의 깊고 거대한 학문의 향기가 그윽하게 피어나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