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강의 첫 시간에 학생들에게 언어(言語)가 무엇이냐고 묻는다. 얼른 대답들을 못한다. 구어체(口語體)로 말하면 ‘말’이고 문장체(文章體)로 말하면 ‘언어’이다. 언어에서 言이란 소리란 뜻이고 語란 의미(意味)란 뜻이다. 그리고 뜻글자 言과 음(音)은 자원(字源)이 같은 것이다. 두 글자 모두 나팔 모양의 관악기를 불고 있는 모양을 본뜬 글자로 처음에는 악기 소리를 가리키는 글자였다. 후에 音은 악기 소리뿐 아니라 세상에 나는 모든 ‘소리’를 뜻하게 되었고 言은 사람의 소리인 ‘말’을 뜻하게 되었다.
語는 言에 ‘나’의 뜻인 오(吾)를 더한 글자로 言이 단순히 사람의 말을 가리키는 것에 비해 語는 나라는 개인의 ‘생각’이 잘 드러나게 하는 말이다. 예컨대 어록(語錄)은 위인들의 생각이 잘 드러난 말을 간추려 모은 것이고 논어(論語)는 공자(孔子)와 그 제자들이 토론한 말을 글로 엮은 것이다. 영어에서는 스피크(speak)와 쎄이(say)로 구분한다. 입놀림이 중심일 때는 스피크라 하고 내용이 중심일 때는 쎄이라고 한다. 그래서 대통령 같은 사람이 말할 때는 반드시 세이로 표현한다.
나는 또 말한다. ‘신문 같은 것을 볼 때에는 행간(行間)의 의미를 살피고 화자(話者)의 말을 들을 때에는 그 저의(底意)가 무엇인지 살펴라.’ 그 말이나 글을 액면 그대로만 받아들여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상대가 뜻하는 바를 잘못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오해(誤解)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릇된 판단(判斷)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는 사람이나 글 쓴 사람이 어떤 의도(意圖)를 가지고 그런 말을 하고 글을 썼는가를 파악(把握)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떤 인텐션(intention)을 지니고 그리 하는가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저의에서 底는 집의 뜻인 엄(广)과 근본의 뜻인 저(氐)의 합자다. 건물의 근본은 터에 해당하는 아랫부분이라는 데서 ‘밑’이란 뜻이 나왔고 큰 항아리 밑바닥은 제대로 들여다볼 수 없기 때문에 底意는 드러내지 않고 속으로 품은 생각을 뜻하게 되었다. 영조(英祖) 임금이 계비(繼妃)를 간택할 때 왕비 후보들에게 ‘무엇이 가장 깊은가?’라고 물으니 ‘산이 깊다’ ‘물이 깊다’ 같은 답을 했는데 유독 한 처녀만이 ‘사람의 마음이 가장 깊다’고 대답했다. 그 까닭을 묻자 ‘사물의 깊이는 헤아릴 수 있지만 사람의 마음은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物心可測 人心不可測也]’라 했다. 그녀가 바로 정순왕후(貞純王后)이다.
뜻[意]을 배우면 지식(知識)이 되고 지식이 쌓이면 깨우침[智慧]이 온다. 정순왕후의 지혜가 바로 그런 것이다. 우선은 뜻을 알아야 한다. 의미(意味)를 알아야 한다. 다음은 지식을 쌓아나가야 한다. 그것도 그냥 쌓아나가는 것이 아니라 체계적(體系的)으로 쌓아나가야 한다. 체계적이지 않으면 정보(information)에 그치고 말기 때문이다. 체계적으로 쌓아나가야 각(覺)이 열리고 지혜가 싹 튼다. 지혜는 그냥 오는 것이 아니다. 축적(蓄積)된 지식체계에서 오는 것이다. 노소(老少)를 불문하고 끊임없이 배우고 익혀야 하는 이유이다.
공자는 사람의 능력과 배움의 관계를 네 가지로 분류했다. 첫째 태어나면서부터 아는[生而知之] 사람으로 배우지 않아도 절로 아는 경우이다. 둘째 배워서 아는[學而知之] 사람으로 후천적 노력에 의해 아는 경우이다. 셋째 곤란을 겪은 후 배우는[困而學之] 사람으로 몰라서 고생하다 비로소 배우게 되는 경우이다. 넷째 곤란을 겪으면서도 배우지 않는[困而不學] 사람으로 배움의 필요성을 절감하지만 배우지 않는 경우이다.
공자는 ‘나는 生而知之한 사람이 아니고 옛것을 좋아해서 부지런히 찾아 배운 사람이다’라고 했다. 타고 난 것이 아니라 후천적 노력이었음을 강조한 것이다. 공자와 같은 성인(聖人)도 이러한데 우리 같은 범인(凡人)들은 어찌해야 하는가? 한눈팔지 말고 게으름 피지 말아야 할 일이다. 또한 위기지학(爲己之學)뿐 아니라 위인지학(爲人之學)도 겸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