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 종 규 독립운동가 유족회
민족의식과 민족정신의 새로운
자각으로 민족자립기초 다져야
3·1절은 1919년 3월 1일 가주독립만세운동의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민족의 단결을 굳게 하여 국민의 애국심을 함양하기 위해 1949년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제정 공포하여 제정된 기념일로 4대 국경일의 하나이다.
일명 기미독립만세운동(己未獨立萬世運動)은 한일 병합 뒤 일본인의 부당한 침략에 항거하는 의병 열사들이 각지에서 독립운동에 나서자 당시 총독부에서는 강력한 무단정치를 감행하여 가혹한 탄압을 자행하는 한편 민족 고유문화의 말살 경제적 지배의 철저화로 우리 민족의 정당한 민족적 저항의 기반을 없애려고 하였다.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중국 만주 소련 미국 등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거나 혹은 지하조직에 의해 비밀리에 기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러한 중 미국 대통형 윌슨(Wilson T.W)의 민족자결주의원칙이 발표되었다. 민족자결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원칙 14개 조항의 일부로 1918년 1월에 제기되었으며 윌슨이 구상하였던 민족자결주의 원칙은 연합국과 대결하였던 독일, 오스트리아, 터키 등에 속하여 있던 식민지에만 적용하여 하였으나 이 원칙이 세계의 모든 피 압박민족에게 하나의 복음으로 받아들여졌고 각기 자국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하여 독립을 요구하게 되었다.
우리의 민족 지도자들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발표가 있자 이에 의거하여 우리 민족의 독립을 호소해 보고자 노력하던 중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중 29명이 서울 인사동에 있는 ‘태화관’에 모여 오후 2시를 기다리던중 최 린은 태화관 주인 안순환을 시켜 조선총독부에 전화를 걸어 민족대표 일동이 여기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축배를 들고 있다고 통고하에 하였다. 이 통고를 받은 일본 경찰대 80여명이 달려와 태화관을 포위하고 있을 때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한용운의 간단한 식사를 들고 이어 대한독립만세를 부른 다음 의연하게 일본 경찰에게 연행되었다.
한편, 파고다공원에는 서울의 중등학교 이상의 남녀 학생 5천여명이 몰려와서 독립선언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2시가 되자 한 청년이 단상으로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낭독이 거의 끝날 무렵 학생들은 모자를 하늘로 날리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종로쪽으로 몰려나와 시위행진에 들어갔다. 본래 독립선언식을 학생들과 민족대표 33인이 함께 파고다공원에서 열기로 되어 있었으나 학생들은 민족대표들을 기다렸다가 그대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른 다음 거리로 나와 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3월 1일 오후2시를 기점으로 봉기된 만세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을 때 수원 제암리에서는 4월15일 일본군 중위가 제암리 마을 사람에게 알릴 것이 있다고 속여 천도교와 기독교도 20명여명을 제암리 교회에 모이게 하고 사격을 가한뒤 증거를 없애기 위해 교회에 불을 지르는 끔찍한 만행을 하였다. 이때 교회안에서 죽은 사람이 22명, 뜰에서 죽은 사람이 6명이었다. 이렇듯 독립을 외치던 우리민족이 만세운동 기간중에 전국에서 집회 횟수가 1천542회, 집회 인원이 202만3천98명이고 사망자 수가 7천509명이나 되며 부상자 수도 1만5천961명, 피검자 수는 4만6천948명 등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우리 포천도 예의는 아니었다. 3월13일 포천공립보통학교에서 독립만세를 불렀고 영평공립보통학교에서도 시도하였으며 3월24일에는 영중면 영평리에서 1천여명과 소흘면 송우리에서 6백여명이 만세를 부르다가 1명이 피검되었으며 3월29일에는 소흘면 무봉리와 군내면 유교리에서 1천200여명이 만세를 부르다가 5명이 피검되고 3월30일에는 신북면 사무소 앞에서 일동, 이동, 영중, 신북면 주민 2천여명과 신북면 가채리와 소흘면 송우리에서 2천여명이 만세를 부르다가 6명이 피검되었고 4월1일에는 일동면 기산리, 4월3일에는 신북면 삼정리, 이동면 장암리,노곡리에서, 4월4일에는 영북면 자일리 등지에서 1천300여명이 독립만세시위를 벌였다.
이러한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켜 한국민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였고 이로 인하여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하게 되었다.
또한 우리 한민족에 대한 끈질기고 강인한 독립투쟁정신을 고취하였을뿐 아니라 일제의 무단통치 방법을 문화정책으로 바꾸게 하였으며 민족의식과 민족정신의 새로운 자각과 힘을 주어 교육의 진흥, 신 문예운동 산업운동을 통하여 민족자립의 기초를 다지게 하였으며 이 운동이 이어져 1945년 광복의 날이 오게 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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