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호에 계속> 운악산성은 포천시 화현면 화현리운악산 산중복(해발고도 350~450m 일대)과 정상부에 세워진 석축산성으로, 기암절벽의 천연지세를 절묘하게 활용한 성곽 형태를 갖추고 있다. 따라서 축성에 동원된 대다수의 군사와 부역장정이 이곳 포천(견성 및 양골현민) 출신임을 추정하게 한다.
산성 길이는 약 2.5㎞에 달하며 높이가 3m~0.5m의 겹성(二重城)인데, 상당 구간이 훼손 멸실되어 정확한 실체는 발굴이 진행되어야 규명될 것 같다. 운악산성은 신라 말와 고려 초의 역사적 공백을 밝히는 중요한 단서이며, 독특한 형태를 갖춘 산성 모형으로 앞으로 많은 연구와 규명이 요구되는 중요 역사자료다.
이 지방의 대표적 향토사지라고 할 수 있는 <포천군읍지>에조차 운악산성의 기록이 없고,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 등의 문헌에도 운악산성의 기록이 없다. 그리고 대부분의 조선 중·후기의 고문헌 및 사료에도 운악산성의 기록이 일체 누락된 것으로 추정하건대, 이미 이 시기엔 군사시설로서의 활용가치를 상실해 버리고 폐성이 되어버린 것 같다. 다만 영조 34년(1758년)에 이세욱(李世郁) 등이 편찬한 <견성지(堅城誌)>에 유일하게 운악산성과 연관된 두 가지 기록이 전해져오고 있다.
첫째로 산천조에 운악산은 포천현의 동쪽 25리에 있다. 즉 가평 현등산의 서쪽에 있는 산이다. 산꼭대기에 옛나라의 궁궐터가 있다?고 기록했는데, 옛나라의 궁궐터라 한 곳이 아마도 현재 궁예왕 대궐터라고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는 무지치폭포 상단의 운악산성 내 평탄지역을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둘째로 충신조에 조득남(趙得男)은 본관이 한양 사람인데, 한천부원군 조온의 후손이다. 포천현의 동쪽 20리 운악산 아래 화성리(花城里)에서 태어나 성장하였다…중략…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의 북문에서 힘을 다해 싸우다 죽었는데 인조 임금이 놀래 애도하면서 유포를 내려 시신을 싸서 북문 아래에 매장토록 하였다. 난이 평정된 후 화성리(花城里)에 옮겨 장례 지냈다?는 기록으로 보아 적어도 이 시기에는 운악산성을 화성으로 불렸었음을 추찰할 수 있다.
따라서 병자호란을 전후한 시기나 <견성지>가 만들어지던 시기까지는 이 지방에서 토착지역민들이 운악산성을 화성(花城)이라고 부르고, 운악산 또한 향명으로 화산(花山)이라고도 불렀음을 이해할 수 있다.
이 지방의 대표적인 방외문인이었던 봉래산인 양사언의 시에 운악산을 이르기를 天作高山壓震方 / 芳名流傳小金剛 / 花峯崔崔參 漢 / 積翠蒼蒼接大荒…이라고 했는데, 花峰崔崔參 漢(꽃같은 봉우리는 높이 솟아 은하수에 닿았고)에서 화성(花城)과 현재의 지명인 포천시 화현(花峴)면의 단서가 되는 부분이 보인다.
운악산은 이름 그대로 뾰죽뾰죽한 기암괴석의 봉우리가 구름을 뚫고 솟아 그 모습이 마치 서기를 품은 한 떨기 향기로운 꽃과 같았다. 그래서 지명이 운악산이 된 것인데, 후일 자연발생적으로 화산(花山?華山)이란 별칭을 얻게 된 것이다.
이런 예가 인근의 가평 화악산에도 있다. <대동여지도> <동여도> <가평군읍지> 등에는 화악산을 화악산(華嶽山)으로 기록된 데 비하여, <수진일용방> <팔도전도> <경기고지도첩> 등에는 화악산(花嶽山)으로 기록되어 華와 花는 지명에서 서로 통용했음을 입증하고 있다.
고대의 성은 수변(水邊)의 요로가 되는 언덕이나 주요 교통로를 이루는 산의 정상부나 고갯마루에 축조되었다. 그래서 고개를 의미하는 ‘재(잣-작-鵲-栢으로도 표기)’라는 말이 ‘성’이라는 의미까지도 뜻하게 되어 오늘날 ‘재 성(城)’이라 부르는 것이다. 따라서 ‘꽃성(花城)’과 ‘꽃재(花峴)’는 결국 같은 의미의 지명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일부 역사연구자들이 화현을 서파 부근에 있는 봉수리라는 지명에 근거하여 ‘봉화를 피우던 고개(峴)→火峴→花峴’으로 주장하기도 하나, 운악산과 봉수대 자리는 거리가 너무 많이 떨어져서 무리가 많은 주장이라고 하겠다. 오히려 ‘툭 앞으로 삐져나오거나 솟은 땅’을 말하는 곶(串)이 변음(격음화)되어 꽃이 되었다는 설(필자)은 문헌연구와 지형지세 관찰을 통해 규명해볼 만한 주장이다.
이 산성은 궁예 세력과 왕건 세력이 포천 지방에서 상당기간 팽팽하게 대립한 역사를 증명해주는 흔적이다. 이런 사실를 증명해주는 분명한 기록이 <고려사> 권1 세가 제1 태조에 전해지고 있다. 계미 6년(923년) 봄 신축일에 명지성(포천의 옛이름) 장군 성달이 그 아우 이달 서림과 함께 고려에 와서 항복하고 붙었다(辛丑 命旨城將軍 城達與其弟伊達瑞林來附)는 기록은 왕건이 궁예를 축출하고 고려 태조로 등극하고서도 6년 동안이나 포천 고을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음을 증명해주고 있다.
이 역사서에는 또 이런 기록이 있다. 정유일에 진각성경 유척량이 혁명(왕조교체) 당시에 여러 동료들은 당황하여 뿔뿔이 도망하였으나 그는 홀로 본성을 떠나지 않았고, 맡은 바 창고는 조금도 손실이 없게 하였다고 하여 특별히 광평시랑의 벼슬을 주었다(丁酉以珍閣省卿柳陟良當革命之際群僚倉卒散走獨不離本省所典倉庫 無所亡失特授廣評侍郞)는 기록으로 본다면 상당수의 호족과 성주가 권력교체의 쟁투에서 어정쩡한 입장을 취하거나 궁예 편에 가담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 중 포천 영평과 연천 양주 일대의 여러 고을은 철원에서 지리적으로 가까워 철원에서 패주해온 일부 궁예 세력과 합세하여 궁예왕 부흥운동을 펼쳤으리라 추찰된다.
운악산 주변에는 궁예시대에 축성한 것으로 구전되는 명성산성, 보개산의 보가산성 등이 남아있다. 또 포천 지방과 연천 지방에 궁예와 관련된 성동리 패주골, 항서받골, 야전골, 망봉, 궁예왕굴, 강씨봉 등의 지명이 수없이 산재한 까닭도 이런 역사적 사실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운악산성이 곧 궁예왕의 피성이라는 주장에는 여러 정황 상 방증근거가 불명확해서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아마도 포천 지방을 지배했던 장군 성달이 축성한 성으로 보이며, 그가 이곳에서 궁예왕의 잔존세력과 연합하여 상당기간동안 왕건에게 복속하지 않고 대항하였던 것 같다. 이런 사실은 고려사절요와 고려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계미 6년(923년) 봄 3월 신축일에 명지성 장군 성달이 그 아우 이달 서림과 함께 귀순하여 왔다(辛丑命旨城將軍城達與其弟伊達瑞林來附-고려사 권 제1세가 제1태조)와 계미 태조 6년(923년) 여름 6월에 신라에 명지성 장군 성달이 고려에 항복하였다(고려사절요 권1)는 기록이 대표적인 기록이다.
신라 후기에는 중앙에서 지방으로 몰락하여 내려간 중앙 귀족과 그 지방에서 성장한 토착적인 촌주(村主) 출신, 그리고 지방의 군사적인 무력을 가진 군진세력(軍鎭勢力) 등이 지방호족으로 대두하여 농민반란 등 혼란한 사회적 환경을 틈타 각지에서 봉기 웅거하였다. 그래서 신라 하대의 호족들은 성주, 장군이라 자칭하면서 중앙의 정치기구를 모방한 독자적인 지배기구. 즉 관반제를 갖추고 지방사회를 통치하기까지 했는데, 북원의 초적두령 양길(梁吉), 양평의 승려 출신 함규(咸規), 하동의 호장(戶長) 출신 정도정(鄭道正), 목천의 백제 유망민 마육황, 풍양의 토호로 추정되는 조맹(趙孟), 전라도 지방의 신라 군관 출신 견훤(甄萱) 등이 대표적 세력이었으며, 특히 그중에서 강력한 세력을 이룬 것이 기훤과 양길의 부하였다가 독립한 궁예였다.
<고려사지리지>에 의하면 전기에는 수령이 파견된 주현이 불과 130개였는데 비해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속현은 무려 374개나 되어 중앙통치력이 지방까지 침투하지 못해 매우 불안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고려는 호족연합에 의한 건국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군현제(郡縣制)는 신라 말 통치질서의 해이에 따라 무너지고 사병을 거느린 호족들에 의하여 전국이 분점되었는데, 호족들의 항쟁 속에서 지배복속의 관계가 생겨 대호족은 중소 호족을 지배하게 되고, 이것이 더욱 진행되어 후삼국의 정립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 지배 복속의 관계는 가변적인 것이었고, 대·중·소 호족들은 엄연히 독자의 지배구역을 보유했다. 이런 상황은 왕건의 통일 이후에도 마찬가지여서 고려는 초기에 호족들과 연합하여 정권을 유지하고 그들의 지배권을 인정하여 간접적으로 통치할 수밖에 없었다. 태조 23년(940년) 또는 고려 초라고 기록된 시기에 주현 명호(名號)의 개정과 함께 잔읍(殘邑)을 부근 군현에 소속시킨 사실은 이들 호족들의 세력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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