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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생/각]새 코고무신


포천신문 기자 / jun28258@gmail.com입력 : 2005년 03월 04일


조귀순
(포천시 가산면 출생, 수필가)



새 학년이 되자 어머니가 새신을 사 주셨다. 빨강, 노랑, 초록의 색깔이 잘 어우러져 아주 고운 기차표 코고무신이다. 너무 좋아 고무 냄새를 맡으며 이불속에 품어 안고 잤다.

걸어서 오십여 분이나 걸리는 오리(五里)길, 멀기만 했던 학교 가는 길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걸음걸음마다 눈을 아래로 살짝 내리 뜨고 신발 코에 눈을 맞췄다. 혹시 짓궂은 사내아이들이 발이라도 걸면 어쩔까 지레걱정도 하였다. 질척한 진흙길은 피해서 길가장자리만 밟고 걸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니 어머니께서 새신은 학교 갈 때만 신고 집에서는 헌신을 신으라고 하였다. 나는 못들은 것처럼 딴 척을 부리다 헌신을 마루 밑으로 쑤욱 밀어 넣었다. 언니랑 살그머니 나가니 아이들이 비석치기를 하자고 하였다. 그러나 발등에 돌을 올려놓으려면 신발을 거꾸로 신어야 하므로 늘어날 까봐 하지 않았다. 까실까실한 바닥이 닳을까봐 고무줄놀이도 싫다고 하였다.

좁고 꼬불꼬불한 논두렁길을 사뿐사뿐 걸었다. 보드라운 풀 위를 걸으면 닳지 않을 것만 같았다. 냉이, 꽃따지, 소리쟁이 까두데기가 부러운 듯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논두렁 위로 나와 있던 개구리들이 풀썩풀썩 논둑 풀숲으로 뛰어들었다. 내가 마치 위엄 있는 대장이라도 된 것처럼 우쭐거렸다.

그런데 미끄러져 새신이 벗겨졌다. 떼그르르 구르더니 하필이면 옆에 수렁(웅덩이)으로 굴러 내려갔다. 놀라고 다급한 마음에 얼른 잡으려다 하마터면 그대로 빠질 뻔했다. 허겁지겁 주위를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손으로는 잡히지가 않아 기다란 막대기를 찾아보았다. 물은 잠잠한데 어째서 동동 뜬 신발은 자꾸만 멀어지는 걸까. 언니가 돌맹이를 한주먹 모아왔다. 하나씩 던져 물살의 포물선을 만들어 가장자리로 오도록 꾀를 써 보았다. 돌이 일으킨 물살에도 한가운데로서 밀려나오질 않았다. 튕겨지는 물방울들이 도리어 신발 속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가만가만 두 손으로 물을 밀어 보냈다. 그런데 아예 물 속 깊숙이 가라앉는 게 아닌가.

아버지께 꾸중들을 걱정이 진사댁 집 채 만큼 부풀어올랐다. 물 속을 바라보면 고무신은 희미하고 걱정 담긴 얼굴만 덩그러니 보였다. 새순 돋은 연둣빛 버드나무가지만 아른아른 흔들렸다. 옛날이야기처럼 나무 꼭대기에 올라가면 선녀가 두레박이라도 내려줄까.

어둑어둑한 논두렁에 쪼그리고 앉았다. 땅거미가 지자 개구리울음소리가 구슬프게 들렸다. 코 속이 쏴하게 맵더니 그렁거리던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어둠이 무섭기도 하고 혼이 날 것에 두려움은 커지고‥‥ . 버들가지 비틀어서 만든 호둘기가 주머니 속에서 잡혔다. 깜깜할 때 호둘기를 불면 뱀 나온다던 말이 떠오르자 더 으스스 했다. 엄마에게 불어 달라고 하려 했는데, 가지고만 있어도 뱀이 나올까봐 풀숲으로 던져 버렸다.

“가자. 내일 날 밝으면 꺼낼 수 있어. 걱정 마.”

언니가 내 팔을 잡아 일으키며 위로하고 달래주었다. 그러자 더 크게 소리를 내어 울었다. 겨우 대문 앞까지는 왔는데 들어가기는 정말 겁이 나 쭈뼛거렸다. 언니가 나를 업었다. 바위처럼 넓은 아버지의 등보다 언제나 그저 좋기만 한 어머니의 등보다 작은 언니의 등이 세상에서 제일 따뜻하고 아늑했다.

신은 지 하루도 못되어 잃어버리고 들어왔으니 얼굴을 등 깊숙이 묻었다. 울음 끝에 나오는 흐느낌으로 어깨가 들먹었다. 방문이 열리는 순간 아예 눈을 감아 버렸다.

“어둬지면 얼른 데리고 들어와야지.”

어머니는 늦게까지 놀다온 것만 조용히 나무라셨다. 나를 아랫목에 눕히고 언니는 수렁에 신발을 빠뜨려 꺼내려다 늦었다고 말했다.

“뭐라구? 새신을 빠뜨렸단 말야? 별나게 까불더라니!”

아버지의 호통소리가 날까봐 어머니가 선수를 치신 것 같았다.

“어디, 누구네 수렁이냐? 꼬맹이가 걱정 꾀나 했겠다.”

생각했던 것보다 아버지는 화를 내지 않았다. 떠내려 간 게 아니니 다행이라는 말씀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제야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배가 고팠지만 그래도 잠든 척 하던 끝이라 일어나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 기지개를 켜며 멋 적어하며 눈을 비비고 마루로 나왔다. 일부러 마루 밑으로 내던진 헌 고무신이라도 꺼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댓돌 위에 짝을 찾은 알록달록한 코고무신이 가지런하게 놓여 있는 게 아닌가. 밤새도록 신발 꿈만 꾸더니 아직도 잠이 덜 깬 걸까. 장대 끝에 묶인 갈고리를 풀고 계신 아버지의 모습이 꿈에서 본 것만은 아니었던가 보다.

noeul4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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