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1592년 4월 13일 (선조25년) 20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하였다. 소서행장(小西行長)을 선봉장으로 하는 1군이 부산을 함락 시켰고, 가토 기요마사와 구로다 나가마사 등과 합세하여 한반도를 세 갈래로 나누어 침공해 올라왔다. 북상중인 왜장이 충주에서 이덕형과 만날 것을 요청하자 이를 받아들여 단기(單騎)로 적진으로 향하였으나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때 조선은 조정을 안정시키기 위해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선조는 의주로 파천(播遷)을 감행하고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는 일을 그들이 수행했다. 피난길에서 백사 이항복은 선조(宣祖)를 호종(扈從)하여 먼저 평양에 도착했고, 왜군진영에 들어가 담판을 하다가 혼자 남께 된 이덕형은 뒤에 혼자서 평양에 도착하여 숙소도 없어 이항복의 숙소에서 동숙을 하면서 전쟁에 대비할 전략을 세웠다.
여기서 이항복과 이덕형은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기로 마음먹고 우선 명나라에 원군(援軍)을 간청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신료들의 의견을 모아 함께 건의하자 명나라의 원군을 청하기로 정했고 그 대표자인 청원사(請援使)로 한음이 선정되었다. 드디어 이덕형이 청원사(請援使)로 명나라로 떠날 때 배웅 나와 남문 밖으로 나와 기다리는 백사에게 ‘말이 한필이어서 하루에 이틀 길을 달릴 수 없음을 한탄스럽군요.’라고 하자, 백사는 타고 있던 말을 풀어 이덕형에게 주었다.
그러면서 백사는 ‘원군을 청하여 함께 오지 않으면 그대는 나를 쌓인 시체 더미에서 찾아야지 살아서는 다시 만나지 못할 것’ 이라고 당부했고, 한음은 ‘원병을 청해내지 못하면 나는 뼈를 반드시 중국의 노령산속에 묻고 다시는 압록강을 건너지 않을 것’이라고 굳은 결의를 보였다고 한다.
명에 들어간 이덕형은 비통한 마음으로 섬돌에 머리를 부딪쳐 피가 범벅이 되고 식음을 전폐하면서 간절하게 원병을 요청했고, 정연한 논리와 정성에 감동한 명은 마침내 원병 파견을 결정하여 7월 중순에 조선의 조정을 호위할 별동군 선봉대를 보냈고, 12월 25일 대장 이여송 휘하의 5만 군대가 압록강을 건넜다.
이때부터 명나라 군대 막사에서 침식을 함께하며 전략이나 군량 등을 챙기며 구국에 몸을 던졌다. 이덕형은 임란 동안 형조·병조(3회)·이조판서(2회)의 요직을 역임했다. 특히 군무를 총괄하는 병조판서를 세 번이나 맡았다는 사실은 전란을 극복하는데 기여한 그의 능력을 보여준다.
그런데 특기할만한 일은 이순신(李舜臣)이 하옥되었을 때 적극 변호를 한 것이나, 전사 후에 나라에 공헌한 바를 높여주는 포장(褒奬)을 요청하는 장계를 다음과 같이 올린 사실이 있는데, 『선조실록』 107권, 31년(1598 무술 / 명 만력(萬曆) 26년) 12월 7일(무오) 5번째 기사에 나오는 내용은 이러하다.
“이순신(李舜臣)의 사람됨을 신이 직접 확인해 본 적이 없었고 한 차례 서신을 통한 적 밖에 없었으므로 그가 어떠한 인물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 신이 본도에 들어가 해변 주민들의 말을 들어보니, 모두가 그를 칭찬하며 한없이 아끼고 추대하였습니다. … 따라서 신은 나름대로 생각하기를 ‘국가가 주사의 일에 있어서만은 훌륭한 주장(主將)을 얻어서 우려할 것이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가 전사하였으니 앞으로 주사의 일을 책임 지워 조치하게 하는데 있어 그만한 사람을 구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참으로 애통합니다. … 이순신의 전사 소식을 듣고서 무지한 노약자라 할지라도 대부분 눈물을 흘리며 서로 조문하기까지 하였으니, 이처럼 사람을 감복시킬 수 있었던 것이 어찌 우연한 것이겠습니까. 이순신이 나라를 위하여 순직한 정상은 옛날의 명장에게도 부끄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포장(褒奬)하는 거조를 조정에서 각별히 시행하소서.”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하였다고 적고 있다.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북인(北人)은 왕위계승과 관련된 분쟁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살해하고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유폐시키는 무리수를 두게 되고 조정은 찬반양론으로 첨예하게 대립했을 때 그는 남인이었다.
하지만 이덕형은 임란 초에 광해군을 세자로 세워 국본(國本)을 안정시켜야 한다고 주장해 후사로 책봉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그 뒤 1608년 진주사(陳奏使)로 명에 파견되어 다섯 달이나 걸려서 책봉 칙서를 받아오기도 했다.
이런 그의 행보는 장인이 북인의 거두였기에 비교적 당색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으며, 1598년(선조 31) 37세의 나이로 정승의 반열에 올랐고, 1602년에는 조선역사에서 매우 드문 41세에 마침내 영의정에 올랐다. 그 뒤에도 두 번이나 더 영의정을 역임했고 익사형난공신(翼社亨難功臣)과 한원(漢原)부원군에 책봉되기도 했다.
그러나 1613년(광해군 5) 여름 인목대비를 폐출하려는 시도가 일어나자 이항복과 함께 강력히 반대했고, 탄핵을 받자 즉시 용진(龍津)으로 낙향했고, 9월에는 삭탈관직의 명령이 떨어졌으며 한 달 뒤인 10월 9일 그는 용진에서 세상을 떠났다.
위기 속에서 인재가 그 빛을 발하듯이 임진왜란과 당쟁의 격동 속에서 영의정을 세 번이나 역임하며, 오직 나라와 백성들을 살려내려는 하나의 마음으로 충성을 다 바쳤으며, 정유재란까지 7년의 긴 전쟁동안 대신(大臣)의 지위에서 평소 갈고 닦은 학문과 인품을 발휘해서 국난을 극복하는 일에 생을 바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