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에 내가 보아왔던 물레방아는 한가하게 돌고 도는 관상용 물레방아가 아니었다. 물을 이용한 실사구시와 경제제민과 이용후생의 농기구였다. 쌀과 보리를 찧었고 설 명절을 앞두고는 가래떡을 뽑아냈고 우리 마을은 물론 인근마을까지 깜빡이는 전깃불을 공급했다.
마람불, 놋점골, 연희막 등 다 합쳐도 하나의 마을로도 시원찮다. 마을에 전기공사가 종일 계속됐다. 전봇대가 세워지고 철선 전깃줄이 가설되고 마을은 온통 술렁거렸다. 며칠만 기다리면 집집이 전깃불이 켜진다는 설렘으로 마을 사람들 마음은 풍선처럼 붕 떠 있었다. 우리 집도 호롱불 졸업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큰방, 작은 방, 아래채에 전구가 설치되었고 다음 날, 저녁이 되었다. 백열등에 전깃불이 켜졌다. 함성이 터져 나왔다. 와! 전깃불이다! ‘깜빡~ 깜빡~ 밝았다가 어두웠다.’를 반복하지만 전깃불이 신기했다.
호롱불만 구경하던 개구쟁이 눈에는 깜빡이는 전깃불이 에디슨의 눈빛 같았다. 물레방아 밑에서 사랑을 나눴다는 형들과 누나들로 못 봤다. 겨울이 오면 물레방아는 가끔 멈춰 서곤 했다. 물레방아 밑에 고드름이 주렁주렁 열리고 물레방아는 온통 얼음투성이다. 얼음을 깨고 녹여야 만이 전깃불도 들어오고 보리쌀도 쌀도 찧을 수 있다. 방앗간 주인아저씨는 도끼로 얼음 깨다 물레방아에서 떨어져 한동안 고생했다. 내가 아는 그 물레방아는 아련한 물빛 추억으로 깜빡일 뿐 보이지 않고 있다. 내 고향은 물레방아 고장이다. 연암 선생 덕택에 확실히 물레방아 고장으로 인식되어 있다. 안심마을 물레방아가 있는 방아 실은 물레방아 체험실습장으로 바뀌었고 예술마을 안에도 대형 물레방아가 돌아가고 있었다.
장숫골 오르는 길 매바우 마을 입구에는 연암 물레방아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물레방아하면 우리 고장의 토속민요가 생각난다. 우리 고장의 토속민요 중 대표적인 것은 '질구내기’이다. 이 민요는 부르면 부를수록, 들으면 들을수록 정겹다.
함양산청 물레방아는 물을 안고 돌고 우리 집/ 서방님은 나를 안고 돈다. 동구마천 큰애기는 곶감 깎기로 다 나가고/ 효성가성 큰애기는 산수 깎기로 다 나간다. 이 민요에는 시골 풍경이 참 잘 묘사되어 있다. 텅 빈 시골마을의 평화로운 전경이다.
물레방아 하면 연암 박지원 선생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선생이 안음현감(安陰縣監/현 안의)시절 물레방아를 실용화하였다. 양지마을에 있는 ‘동채방아’는 ‘가랑지’ 보(洑)에서 ‘지우천’을 끌어들려 돌렸다. 무더위가 기성을 부리는 한여름에는 물레방아 근처만큼 시원한 데가 없다. 수레바퀴처럼 쉼 없이 돌아가는 물레방아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눈꺼풀이 사르르 감겨온다.
한참 후 눈을 떴을 때에도 물레방아는 평화롭고 한가하게 계속 돌아가고 있었다. 우리의 설을 며칠 앞둔 방아 실은 가래떡 뽑느라고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기계 콧구멍에서 두 줄 종대로 뽑아져 나오는 뽀얀 가래떡이다! 모락모락 김 풍기는 가래떡을 잘나내는 아낙네의 손놀림은 대단했다. 우리 개구쟁이는 기회를 엿보다가 먹기를 낚아채는 독수리처럼 가래떡 한 줄 잽싸게 낚아 그냥 튀었다. “저놈들 봐라! 참 별일 다 있네!” “저 아가 뉘 집 아고?” 나는 철이와 함께 양지바른 볏짚 뒤에 쭈그리고 앉아 따끈따끈한 가래떡을 먹으면서 설날을 기다렸다.
지금도 고향에 가면 물레방아는 있어도 고향의 넉넉한 정취를 느끼게 해줄 물빛 물레방아는 없다. 물레방아는 문학의 소재로 가요의 노랫말로 등장하기도 한다. 물레방아를 소재한 대표적인 작품이 나도향의 소설 ‘물레방아’이다. 이 작품에서 하필이면 물레방아가 불륜과 비극의 장소로 등장했는지 의문이 간다. 물레방아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가장 서민적인 장소이며 인간과 자연이 공감하는 성스러운 곳이다.
이곳에서 비극은 자연의 순리를 거부한 자연의 응징, 물레방아의 생산성은 자연스럽게 남녀의 애정문제나 에로티시즘을 연상하게 한다. 하지만 물레방아는 비극이나 불륜의 장소가 아니다. 서민의 애환과 삶의 희망이 녹아있는 우리의 역사의 한 페이지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