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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용 칼럼] 눈물로 나라를 걱정한 따뜻한 선비


이희용 기자 / heeyeong1@hanmail.net입력 : 2013년 10월 09일
↑↑ 이희용 칼럼니스트, 포천신문 자문위원
ⓒ (주)포천신문사
우리고장 포천의 정신을 지켜 온 선비들의 나라를 사랑한 숭고한 실천은 다른 어느 지역에서도 찾아 볼 수 없고 마음이 아리도록 침착하고 깨끗한 실천이 있었음을 여려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특히 뛰어난 애국지사를 많이 배출했던 포천의 화서학파는 국운이 백척간두에 처했을 때는, 의병을 일으켜 빼앗긴 나라를 구하고자 온몸을 던졌으며 교활한 외세의 침탈에는 무력으로 극렬한 저항을 하였는데, 그 중심에는 올바른 학문적 소양과 불의에 항거하는 애국유생들의 솔선수범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외세에 의한 침략과 파괴의 시대를 겪고, 일제 강점기와 남북분단에 이은 한국전쟁의 역경과 혼란의 시기를 지나며 물질문명에 깊이 빠져들어 눈앞에 이익만을 추구하다보니, 사람을 중시하고 자연을 귀히 여기던 우리고유의 정신과 실천의 온전한 정체성을 잃어 가고 있는 현실이 마음 아프다.

가산면 금현1리 새로 난 길 언저리에는 초라하게 기울어 가는 선현자취가 남아있다. 이 자리에는 격동의 시절에 인을 실천한 선비의 뜻을 기리고자 세워놓는 유허비(遺墟碑)가 있는데, 거기에는 치열한 삶을 통하여 국권을 지키려던 반듯한 선비의 삶을 적어 놓았는데 보존상태가 너무도 참담하여 가슴이 시렸다.

이 비석에 새겨 있는 인물은 ‘지재(持齋) 이철영(李哲榮) 선생(1853~1943)’으로 비문은 선생의 친우들과 우리고장 모든 선비들이 정성을 모아 돌을 다듬었고, 그 내용 속에는 숨어있는 우리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는데 요약 하면 이렇다.

선생의 호는 지재(持齋)이며 본은 경주이고, 계축년(1853) 5월 19일 생으로 어려서부터 성품이 바르고 다른 사람에게 베풀어주기를 잘하였고, 안으로는 앞대의 큰 학자였던 직와(直窩) 이유선(李裕善)선생의 가르침을 받았고, 밖으로는 중암(重庵) 김평묵, 용서(龍西) 유기일 두 분의 정학(正學)의 연원을 받들어 실천한 적통의 제자였다.

부모님을 섬김에 있어서 평소 그 공경함이 지극하여 부친이 병중에 계실 때는 손가락을 찧어 피를 올렸으며, 3년 상(喪)에 술과 고기를 끊고 근심으로 받들었고, 나라를 사랑함이 한결같아 국권이 침탈당했던 병자년에는, 초야의 선비로서 분연히 일어나 용서 선생과 함께 경기 강원에 유생 50인이 연명하여 상소하였다.

그리고 명성황후의 억울한 승하에 통탄을 금치 못해 흰옷에 흰 갓을 쓰고 상복을 입을 채로 남은 해를 마쳤으며, 해마다 고종이 돌아가신 날에는 자손들을 거느리고 산에 올라 북쪽을 향해 향을 피우고 절을 하며 눈물을 흘리며 우셨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일제에 항거하고 국권침탈을 개탄하여 1912년 6월 7일에 화봉산 근방의 유생을 모아 ‘노인사진솔회’라는 선비들의 모임을 조직하여 그 발문(跋文)을 쓰며 울분을 삼키셨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이 모임이 항일·독립운동을 하는 단체로 낙인 되어 일본경찰에 감시를 받기도 했다고 하니, 모임의 발문을 썼을 정도로 유생들의 신망도 두터웠고 그래서 애국유림의 계모임을 앞장서서 이끌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중암과 용서 두 분의 스승이 돌아가신 후에는, 홀로 학통을 이어 화양서사(華陽書社)라는 배움터를 만들어 널리 학문을 게을리 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베풀었는데 원근각처에서 사람들이 배우기 위해 모여들었다.

특히 공자가 그러했듯이 학문에 뜻이 있어 배우고는 싶으나 학비가 없거나 신분의 귀천을 따지지 않고 모두에게 식사를 제공하면서 인의예지를 가르쳤으니, 배우러 오는 이가 끊이지 않았고 문하에서 능력을 이룬 선비가 많이 배출되었다고 한다.

공손하였던 선생의 품성과 밝고 맑은 영혼으로 욕심이 없어 옥처럼 깨끗하고 그 맑음이 얼음과 같으셨으니, 화서학문의 정통을 지키셨으며 글을 지어 학문에 도달하니 그 정확하고 자세함이 어디에 비할 바가 없다고 하였다.

임오년(1943) 향년 90세를 일기로 돌아가셨으며, 그 후 22년이 지난 1965년 10월에 ‘동문에 제자들이 뜻을 모아 평소 지팡이를 짚고 짚신을 보습을 뵙던 자리에 화양서사의 옛집에 유허비를 세운다.’ 는 제자 유석렬이 짓고, 이종형이 쓴, 비문에는 지재선생의 학문을 사랑하고 제자들에게 보여주셨던 덕행이 눈에 선하게 스며들어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 전쟁의 포화로 가산학교가 불타서 갈 곳이 없었을 떼에는, 지재 선생의 숨결이 남아 있는 화양서사 자리에 임시로 학교를 옮겨가 수업을 하였다고 하니, 주위사람들에게 선생의 고귀한 덕행이 오래도록 남아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유허비의 마지막에 “화산(華山)은 높고도 높으며, 한천(漢川)은 세차게 흐르도다. 선생의 남기신 풍모는 그와 더불어 모두 장구 하리라!”는 구절을 보면서 학풍은 높고 한내는 도도히 흐름을 말하고 있으니 가슴에서 끌어 오르는 거대한 역사를 대하는 것 같았다.

아무리 그 분의 제자들이 모두 돌아가시고, 돈이 양반이요. 물질이 중요하고 권력이 세상을 지배한다고는 하지만, 나라를 걱정하는 우국충정으로 덕행을 베풀고 후세를 교육하신 선비의 뜻이 지엄하니, 포천의 유림들과 대표자들은 고귀한 선생의 유지를 방관하거나 버려두지 말고, 유허비의 주변을 정비하고 향토사적인 의미를 찾아 오래도록 보전함을 주저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 희 용
문화평론가, 향토사연구가, 대진대학교 박사과정원우회장, 한국스카우트경기북부연맹 이사, 전경기도예총부회장, 포천시수능시험장유치위원장, 포천신문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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