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 명절 때 포천 고향집에 머물면서 초등학교 깨복쟁이 친구들을 오랜만에 만났다. 매년 설과 추석 때마다 초등학교 동창회를 열어 왔다. 타지에서 살고 있는 친구들이 고향을 찾는다는 점을 활용한 택일이다. 이번에도 예전처럼 절반가량 나온 듯하다. 전국 각지에서 흩어져 살거나 아예 고향을 떠난 이들도 있기 때문이다. 외국에서 사는 친구들도 있다. 졸업 후에도 한 번도 못 본 친구들도 있는 것 같다. 단지 어린 시절 모습만 떠오를 뿐이다.
그리움이 사무친다.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어떻게 변했는지 소식이 궁금하다. 또 안타깝고 절절한 사연도 수없다. 당시 필자가 초등학교 다닐 때 졸업생이 100여명 남짓했는데 벌써 10여명이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다. 스무 살 초반 때 사고로 세상을 먼저 떠난 친구도 있고, 불의의 사고와 병마의 고통을 당하다가 떠난 친구들도 있다. 먼저 하늘로 먼 길을 떠닌 친구들의 이야기만 들으면 가슴이 절절하다. 친구들의 모습이 사무치게 그립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지 훌쩍 근 40년의 긴 세월이 흘렀다. 어찌나 반가운 동창들의 얼굴을 보니 소주잔 기울이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유년시절 코흘리게 모습만 떠올리게 되는 이제는 우리들이 불혹의 끝자락이다. 머리칼도 희끗희끗해졌다. 새치라고는 할 수 없을 만큼 나이 들었다는 표징이다. 잔주름은 기본이고, 뱃살도 넉넉하게 나와 한눈에 보아도 중년의 모습이다. 덧없이 흘러간 세월이 야속하기만 하다. 냇가에서 함께 놀던 깨복쟁이 친구들을 만나해 준 내촌초등학교는 영원한 모교이다. 유년시절과 성장기를 지나 지금까지도 나의 삶을 있게 해 준 곳이다. 꿈을 키우고, 사고방식도 만들어 준 곳이다.
초등학교 시절에 홍역과 볼거리를 앓아 어머니 등에 업혀 겨우 학교를 갔던 기억도 생각난다. 필자가 초등학교 시절에는 교실이 마루바닥이었다. 기름칠과 왁스로 바득이 반들반들거렸던 기억이다. 겨울철에는 교실 한가운데 장작과 시커먼 조개탄을 태우던 쇠난로가 있었다. 급식이 안돼 도시락을 싸가던 시절인지라 찬밥을 난로에 올려놓고 뜨끈하게 데워서 먹던 기억이 새롭다. 늦가을이면 싸리비를 학교로 가져가고, 부족한 연료탓에 솔방울과 송진덩어리도 가져간 기억도 선명하다. 당시 통학 때마다 아침 일찍이 동네마을회관 앞에 모여 이름표를 단 선후배들과 함께 줄을 맞춰서 걸어갔던 기억도 있다.
주금산 산자락이 시작되는 음현리에 있는 암안절과 마명리의 서능공원으로 소풍갔던 기억도 아련하다. 돌틈새와 나뭇가지 사이에 숨겨놓은 보물찾기를 하며 즐거워하던 모습도 떠오른다. 가을운동회의 모습도 눈에 선하다. 만국기가 펄럭이고, 응원가 소리가 청명한 가을하늘을 뒤흔들었다. 청백팀으로 나뉘어 기마전과 차전놀이를 했던 기억. 석회로 흰줄을 그어놓은 운동장에서 뜀박질하던 기억도 난다. 대기선에서 출발을 알리는 총성이 울릴 때까지 가슴이 두근두근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운동회날은 소풍날과 함께 귀한 햄이 들어난 김밥에 삶은 계란, 음료수가 진수성찬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는 장난감총과 풍선 등 온갖 갖고 싶은 물건들로 가득했다. 추억거리가 가득한 유년시절을 함께 보내고 자란 나의 모교는 물론 깨복쟁이 친구들은 한시라도 잊을 수가 없다.
“주금산과 소학천에~우리 고장에 배움에 길을 찾아~.....(중략) 우리 내촌학교”, 오랫만에 흥얼거려보는 모교 교가의 초입부다. 내촌초등학교는 지난 1930년에 개교해 금년이 79회 졸업식을 가진 역사와 전통이 있는 학교다. 지금까지 졸업생 수가 5,520명에 달한다. 바른 인성과 튼튼한 몸으로 미래를 개척하는 창의적인 어린이를 만드는 것을 교육목표로 하고 있다. 교훈은 ‘성실’, 희망을 상징하는 ‘개나리’가 교화이고, 정직, 패기, 젊음을 상징하는 ‘은행나무’가 교목이다. 지금은 번듯한 학교건물이 있지만, 그 당시 학교시설도 낡고 초라했다. 모교는 6.25 한국전쟁 당시 전 교실이 전소되는 아픔도 겪었다고 한다. 1995년에는 조리실과 식당을 새로 짓고, 2008년에는 급식실과 식당증축, 학교 리모델링 공사 등 교육시설도 개선했다. 내가 다니던 학창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아졌다.
하지만 전국적인 현상인 출생률 저하에 따른 후유증과 여파는 모교도 피할 수 없었다. 필자가 다닐 때만 해도 한 학급에 50명이 넘었고 2학급이 있었는데 전교생이 6백명에 달했다. 당시 남자반과 여자반 2개 반이었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올해 전교생이 겨우 171명에 불과하다. 올해 졸업생수가 43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더욱 우울한 소식은 1학년생이 고작 17명에 달한다. 전국적인 농어촌 지역과 도농복합지역에 소재한 학교들과 비슷한 현상이겠지만 졸업생의 입장에서 가슴 아픈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최근의 출생률을 감안한다면 계속해서 줄어들지 않을까 우려스럽다
필자의 고향 내촌면도 다른 농촌마을처럼 나이 드신 어르신들이 상당하다. 어린아이 울음소리가 간간이 들릴 뿐이다. 젊은 부부들이 일자리를 찾거나 교육여건 등 이런저런 이유로 고향을 등지고 있다. 이런 추세가 지속되면 자칫 폐교의 위기까지 닥쳐올 수 있지 않을까 불안감이 엄습한다. 갈수록 줄어드는 모교 신입생과 졸업생을 더 이상 수수방관할 수는 없다. 지금부터 대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내촌면이 살기 좋은 고장이 되는 수밖에 없다. 젊은이들이 떠나는 고장이 아닌 머무는 고장, 돌아오는 고장이 될 수 있도록 행정당국과 면민들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모교의 신입생이 계속 이어질 것이다.
국적은 바꿀 수가 있어도, 출신학교 만큼은 바꿀 수가 없다는 말이 있다. 그 만큼 자신의 모교는 평생 잊을 수도, 바꿀 수도 없는 족적이다. 대한민국 사람들은 고향과 출신학교 등 각종 연고에 익숙해 있다. 생면부지의 사람들도 연고가 있다면 금세 친구나 오래된 지인처럼 편하게 대한다. 물론 연고를 지나치게 따지는 것은 단점도 될 수 있으나 소속감과 일체감, 공동체 문화와 같은 긍정적인 면도 크다. 세계 어느 나라도 마찬가지다. 초등학교 동문들의 끈끈한 유대관계는 지역사회 발전의 기틀도 될 수 있다. 어린 시절 주금산과 죽엽산의 높은 봉우리를 보며 꿈을 키우던 내촌초등학교 동문들이 면민들과 합심 노력해서 영원한 나의 모교를 만들어 가기를 기대하고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