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 귀 순 (포천시 가산면 출생, 수필가)
어려서 편지 쓸 일이 자주 있었다. 서울에서 직장에 다니는 큰언니에게 어머니는 막내인 나더러 답장편지를 쓰게 하였다. 방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어머니가 불러 주시는 대로 양면 괘지에 받아 적었다.
‘큰애 보거라 객지서 고생이 많구나. 여긴 큰집석껀 다들 무고하다. 조석은 잘 챙겨먹는지 궁금했는데 안심이구나. 수일 내 한번 다녀가라. 그저 모쪼록 몸성히 잘 있거라.’ 소가 새끼를 낳았다던지 모내기를 한다던지, 특별한 일이 없으면 쓸 때마다 내용은 거의 비슷비슷했다. 뚝뚝한 아버지는 윗목에 앉아 봉초담배를 꺼내 담뱃대에 넣으면서 ‘거, 돈 허투게 쓰지 말구.’ 하신다. 하지 않으면 안 될 말씀 인 듯, 빠뜨리지 말고 쓰라는 뜻이다. 어머니는 알았다고 했지만, 객지에 혼자 있는 큰딸이 안쓰럽고, 행여 라도 마음이 상할까 그 말은 쓰라 하지 않았다.
부모님께서 걱정하실까봐 언니가 자주 편지를 보내왔다. 편지의 첫머리에는 항상 ‘부모님 전상서’ 라고 씌어 있었다. ‘부모님께서는 농사일에 얼마나 고생이 많으신지요, 편찮으시지는 않으신지요, 동생들도 모두 열심히 공부 잘하고 있겠지요. 일일이 안부를 묻고 난 후, 부모님의 염려 덕분에 저는 잘 지내고 있다는 말까지는 항상 잊지 않고 썼다. 그리고 봄이면 어머니가 해주신 쑥 개떡이 맛있다, 여름장마에 집 뒷논의 논두렁은 무너지지 않았는지, 부엌아궁이에서 물은 나오지 않는지 걱정을 하였다. 가을에는 타작마당을 생각하고, 찬바람이 불면 눈이 내리기 전 곧 부모님의 털신을 사가지고 가겠다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자주 찾아뵙지 못하여 죄송하고 끝인사 앞에는 불효자를 용서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한자의 뜻을 알기 전까지 나는 부모님전상서 란 여섯 글자는 성과 이름처럼 함께 붙여 쓰는 것으로 알았다. 자식이름 앞에는 불효자를 꼭 써야만 답이 다 맞은 시험지 같았다. 그렇게 쓴 편지를 보아온 탓인지 나중에 어머니께 편지를 쓸 때에도 의례 꼭 어머님 전상서 라고 썼다. ‘어머니께, 또는 보고 싶은 엄마 받아보세요.’라고 써놓고 읽어보면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였다. 왠지 부모님의 격을 낮추는 것 같이 생각되었다.
부모님께서는 늘 그런 편지를 기다렸다. 이틀에 한번씩 집배원(당시는 우체부아저씨)이 지나갈 무렵이면, 뒷밭에서 콩밭을 메다가, 조 이삭을 자르다가도 몇 차례씩 뒤를 돌아다보았다. 우체부아저씨가 곧은길로 해서 곧장 윗말로 올라가지 않길 바랐다. 자전거의 핸들이 우리 집 쪽으로 꺾이면 일손을 놓고 잰걸음으로 달렸다. 흙손으로 대문틈새에 꽂혀있는 편지를 뜯어 읽으시며 마치 딸의 얼굴을 본 것처럼 기뻐하셨다.
공부하러, 또 직장을 찾아 객지로 나갔던 자식들이 명절에 하나 둘 씩 들어 올 때 함께 오지 못해도, 그래도 그 찾아뵙지 못해 송구하다고 적힌 부모님 전상서가 얼마나 큰 위안이 되었는지 모른다. 저녁 내 아쉬움과 반가움을 반반씩 뒤섞어가며 몇 번씩 읽던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런데, 정말 “부모님전상서”를 올려 본지가 언제였던가? 전화가 생긴 뒤로 뜸해졌다. 게다가 요즘은 전자우편(이메일) 때문에 더 더욱 편지 쓸 일이 없어져 쓰던 김에 내처 부모님께도 올리던 글을 아예 잊고 말았다.
이제는 혼자되신 어머니. 눈 더 어두워지시기 전에 그리고, 보낼 곳이 없어 부치지 못한 글이 되기 전에 “어머님 전상서”를 올려보련다. 말로는 미처 다 표현하지 못하는 진솔한 마음도 글에는 담을 수 있지 않은가. 긴긴 밤 잠이 오지 않을 때 꺼내 읽고 또 읽어보시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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