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일대에는 가장 낮은 곳의 향기가 숨 쉬고 있는 종교 성지들이 많다. 특히 전주 풍남문 한옥마을에서 출발해 완주~김제~익산을 거쳐 다시 돌아오는 모두 9개 코스의 총 240㎞ 구간에 선각자들의 체취가 묻어나는 성지들이 즐비해 있다.
여기에는 개신교, 불교, 원불교, 유교, 천도교, 천주교, 그리고 대순진리회와 관련된 풍부한 얘깃거리가 많이 담겨 있다. 그러므로 여행자들은 세속적인 문명의 틈 사이로 난 길고 가느다란 이 ‘아름다운 순례길’에서 순교자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의 자취가 주는 위안을 마음껏 호흡할 수 있다.
이 ‘아름다운 순례길’의 첫 출발지는 ‘도끼에 처참히 살점이 떨어지는 자리에 아름다운 향기’가 묻어나는 전주의 풍남문 전동성당이다. 정조 시대에 천주교 신자였던 윤지충은 당시 유교전통에서 본다면 패륜행위였던 신주와 제사 음식 없이 어머니의 장례를 천주교 관례에 따라 사촌 권상연과 함께 치렀다. 이로 인해 윤지충은 혹독한 문초를 받았지만 마지막까지 자신의 신앙과 믿음을 굽히지 않고 참수 당했다. 후대에 와서 천주교 신자들이 최초의 순교인 신해박해의 선각자들을 기리기 위해 전동성당을 세웠다.
이 순례길의 북쪽 길목에는 나바위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이 나바위성당은 첫 한국인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1845년 중국 상하이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귀국길에 올라 첫발을 내디딘 곳이다. 나바위라는 이름은 화산 끝자락에 위치한 넓은 바위에서 유래했다. 이 건물은 1897년 설립 당시 화산본당으로 불렸지만 1989년 이후에 나바위성당으로 개명되었다. 나바위 성당은 정면에서 보면 붉은 벽돌로 종탑을 지어올린 서양식 교회지만 독특한 한국적인 미를 느낄 수 있다. 이 성당은 1906년 한옥 목조건물로 지어졌지만 1916년까지 증축을 거듭하면서 한옥과 양옥의 복합형 건물형태를 옛날 그대로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본당내부는 남녀의 자리를 구분하는 전통방식을 간직하고 있고, 세례대와 성상에는 청나라 건설 기술자들이 와서 남긴 팔각 창문에서 보듯, 중국 남경 성 라자로 수도원과 같은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지난 1987년 7월에 나바위성당은 ‘국가문화재 사적 제318호’로 지정됐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순례길’의 핵심은 여러 민족종교의 성지가 모여 있는 모악산이다. 모악산은 꼭대기에 아이를 안은 어미 형상의 바위를 갖추고 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이 모악산 도립공원에 자리한 금산사는 통일신라 진표율사 때 창건돼 미륵신앙의 성지로 추앙받아온 절이다. 금산사에는 71개 말사를 통괄하는 조계종 제17교구 본사로서 많은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고, 삼층목탑 형식의 화려한 미륵전 내에 모셔진 동양 최대 실내입불(국보 제62호)을 포함해 보물 10점이 간직되어 있다.
특히 금산사 미륵전의 미륵부처에 대한 얘기는 당시 시대에 절망한 민초들에게 유일한 삶의 등불이었다. 19세기 말 동학혁명의 중심지였던 이곳에서 유, 불, 선을 아우른 대순진리회가 태동했다. 모악산 자락에는 목재 십자가 탑이 있는 금산교회가 자리하고 있다. ㄱ자형 한옥의 이 교회는 남녀 신도석을 구분하고, 중앙에 휘장을 쳐 남녀가 유별한 유교적 관습이 낳은 건축형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 교회의 터 주인은 이곳에서 마방을 운영하던 부호 조덕삼이었는데, 그는 전통적인 유교집안에서 자랐으나 기독교 복음에 감화되어 1905년 자신의 땅을 교회에 내놓았다고 한다. 그 당시 조덕삼의 집에서 마부로 일하던 이자익이 기독교에 귀의해 장로로 선출되자 상전인 조덕삼이 "이 결정은 하나님이 내린 결정"이라며 기꺼이 따랐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조덕삼은 후일 이자익을 평양으로 유학 보낸 후 금산교회의 담임목사로 초빙해 모셨다고 한다. 금산교회는 기독교의 평등사상과 유교의 반상의 질서가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상호 공존하는 상징적인 장소인 것이다.
이 밖에 이 ‘아름다운 순례길’에는 1866년 병인박해 때 10여명의 순교자가 묻힌 천호성지, 1893년에 건립된 서문교회, 그리고 신라 말기 창건된 송광사 등이 자리하고 있다. 여행자들은 이 ‘아름다운 순례길’을 걷다 보면 모악산의 정겨운 풍경을 만나기도 하고 김제의 넓은 곡창지대를 지나기도 하고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조용한 숲길도 걷게 되고 금강을 따라 이어지는 강변길도 걷고 때로는 시골의 외딴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교회의 손때 묻은 반질반질한 마룻장을 어루만지기도 하고 그리고 오랜 소망의 발길로 둥글게 닳은 사찰의 돌계단을 접하기도 한다. 이들은 저마다 종교의 유무와는 상관없이 앞서 삶을 살았던 선각자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의 흔적과 자취를 호흡하면서 자신의 폐부에 남아있는 부질없는 세속의 앙금을 말끔히 씻어낼 수 있다.
우리는 어쩌면 상처가 깊을수록 그리고 위로가 절실할수록 이 길을 더 의미 있게 걸을 수 있을지 모른다. 우리는 신분과 계급과 종교를 뛰어 넘어 가장 낮은 자리에서 힘든 삶을 살았던 민초들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희생한 선각자들의 삶의 향기에서 위안을 얻어 우리의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 비옥한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는 이 순례길 일대에 성지들이 유독 많은 이유는 수확이 풍요로운 만큼 정치권력의 수탈과 민초들에 대한 착취가 극심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러므로 어쩌면 이 길은 가장 낮은 자리에서 자신들의 인간조건에 항거한 민초들의 고통과 눈물의 정취가 만들어낸 꿈의 길인지도 모르겠다. 전북은 이 ‘아름다운 순례길’에서 9월 28일부터 10월 5일까지 '2013세계순례대회'를 개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