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배고픈 것은 참을 수 있는데 배 아픈 것은 참을 없다’는 말을 한다. 또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프다’는 말도 한다. 시기심(猜忌心)때문이다. 샘나서 미워하기 때문이다. 남의 재능을 시기하고 남이 잘되는 것을 시기하기 때문이다. 못마땅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시기하고 질투(嫉妬)하기 때문이다. 저보다 나은 사람의 꼴을 못 보겠다는 것이다. 아니꼽다는 것이다. 건방지다는 것이다. 시기와 질투의 표적(標的)이 되지 않으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겸손(謙遜)해야 한다. 겸손은 남을 높이고 자기를 낮추는 것이다. 뽐 내지 않는 것이다. 으스대지 않는 것이다. 스님들이 말하는 하심(下心)이 바로 겸손이다. ‘겸손하고 또 겸손 하라’는 것이다.
같은 선행을 하고도 어떤 사람은 칭송(稱頌)을 받고 어떤 사람은 질시(嫉視)를 받는다. 또 어떤 사람은 고마워하고 어떤 사람은 시큰둥해 한다. 왜 그런가? 진정성(眞情性)이 없기 때문이다. 으스대기 때문이다. 겸손함을 잃었기 때문이다. 많은 것을 줘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많지 않더라도 정성(精誠)을 다하면 되는 것이다. 성의(誠意)가 담겨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과공(過恭)은 비례(非禮)라는 말이 있다. 지나침은 오히려 부담이 된다는 말이다. 저의(底意)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대가성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떳떳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이들 앞에 당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손이 부끄럽고 이웃보기가 부끄럽기 때문이다.
어떤 문화권(文化圈)이든 빠지지 않는 공통 잠언(箴言)이 있다. 잠언이란 사람이 살아가는데 교훈(敎訓)이 되고 경계(警戒)가 되는 짧은 말을 이른다. 그것은 바로 ‘겸손 하라’다. 폼 잡고 싶어 그렇게 고생했는데 겸손하라고 한다. 폼 잡고 싶은 사람들에겐 환장할 노릇이다. “나 이만큼 성공했다.” “나 이만큼 잘 산다.” 요즘 각 방송국에서 내보내는 ‘잘 먹고 잘살자’는 프로를 보면 서로 경쟁이나 하듯 난리다. 종편만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3사 공중파 방송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어쩌자는 건가? 칭찬(稱讚)해달라는 말인가? 존경(尊敬)해달라는 말인가? 위화감(違和感)을 조성하는 건 아닌지 되돌아볼 일이다. 자성(自省)할일이다.
도대체 왜 인간은 겸손해야만 하는가? 간단하다. 다른 사람들의 시기심을 자극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의 비위(脾胃)를 건드리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타인도 배려(配慮)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리산 자락 운조루(雲鳥樓)에는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자를 써놓은 유명한 쌀뒤주가 있다. 필요한 사람들이 알아서 쌀을 퍼가도록 배려한 것이다. 이웃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타인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타인의 시기심을 자극하는 순간 바로 ‘아웃(out)’이다. 퇴출(退出)이다. 그래서 요즘 ‘한 방에 훅 가는’ 사람이 그토록 많은 거다. 연예인들이 요즘 부쩍 토크쇼에 나와 눈물 흘리며 ‘나도 힘들고 괴롭고 어렵다’고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집단적 시기심의 표적이 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야흐로 시기사회(猜忌社會)에 살고 있지 않나 싶다. 시기사회의 근본 문제는 자신의 시기심에 관해 아무도 드러내놓고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내면에 숨기고 있다. 성찰(省察)해야 한다. 자신의 시기심이 정당 한가 성찰해야 한다. 그리고 겸손해야 한다. 마음을 내려놔야 한다. 성찰의 부재(不在)는 온갖 분노와 적개심(敵愾心)이 모두 정당한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이것은 집단적 사디즘(sadism)이다. 집단적 사디즘이 도덕적(道德的)으로 타당하고 이념적(理念的)으로 옳은 것처럼 주장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품격 있는 사회란 시기심의 세련된 관리를 의미한다. 분노와 적개심이 치밀 때마다 이 분노의 근원이 과연 ‘정당한 시기심’인가에 관해 성찰해야 한다. 그리고 겸손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