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2월9일은 음력 2005년1월1일이다. 본지는 한국명륜회장이며 전 포천문화원 최종규 원장으로부터 ‘을유년 설을 맞으며’란 특별원고를 받아 게재함으로써 민족 고유의 명절인 설의 의미를 되새기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 <편집자주>
‘묵은해를 보내고 새로 맞이하는 한해’
‘생산 촉진·사회 결속·소속 재확인’
 최종규 한국명륜회장
“설”의 유래(由來)
“설”은 새해의 첫머리며 “설날”은 새해의 첫날이다. 설은 묵은해를 보내고 새로 맞이하는 한해에 첫날이며 첫머리이다.
따라서 “설”이라는 어원은 “설다”, “낯설다”등의 “설”이라는 어근에서 나온 듯 하다. 즉 “설”은 묵은해에서 새해에 통합되어 가는 과정에서 새해에 통합되기에는 익숙하지 못한 단계이기에 이점에서 “설다”는 의미가 내재라고 있는 것이다.
또한 “설”을 한자로 신일(愼日)이라고도 한다. 그 뜻은 설기 때문에 삼가고 조심하는 날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원시적 농경사회에서는 식물의 생산, 재배, 채취의 주기가 자연력에 의하여 결정되고 있음을 실생활의 경험을 통하여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들의 1년이라는 것은 파종에서 재배, 수확까지의 주기를 의미하였으며 한마디로 염(捻)의 뜻이 연(年)과 통하는 것도 이러한 뜻이 있으리라.
우리 한국인은 나름대로 우리의 역법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중국인들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은 “삼국지”에 이미 부여족이 역법을 사용한 사실이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단순히 중국에 역법에만 의존한게 아니라 자생적인 민속력이나 자연력을 가졌을 가능성을 생각하게 한다. 특히 신라만의 명절로 보이는 가위(嘉위)나 수릿날(5月 5日 )의 습속이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역법을 가졌을 가능성이 있다 하겠다. 그러나 현재 거의 중국 정래의 태양 태음력이나 십이간지법(十二干支法)이외에 우리의 것을 찾을 길이 없다.
“설”은 적어도 6세기 이전에 중국에서 태양 태음력을 받아들인 이후 태음력을 기준으로 제정된 것으로 생각된다.
설날이 제정되면서 중국에서 이행되는 연초의 의례들을 사회상층과 관리측에서 받아들여 원단(元旦)으로 이행(移行)시키면서 반례화(班禮化)하였으며 이날을 정조(正朝), 원조(元朝), 원단(元旦)이라 칭했다.
“설”이 언제부터 우리의 명절이었는지 명확한 기록은 없으나 중국의 사서 중에는 신라인들이 원일(元日)의 아침에 서로 하례하며 왕이 잔치를 베풀어 군신을 모아 연회를 베풀고 일월신(日月神)을 배례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사에도 구대속절(九大俗節)의 하나로 기록되었으며 조선조에서는 사대명절로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다.
“설”의 고난기(苦亂期)
이러한 전통이 내재되어 잇는 우리의 “설”이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부터 “설”을 빼앗기고 우리의 말, 우리의 글, 우리의 역사, 우리의 성까지도 뺏어가고 우리의 민족문화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이때의 설은 양력설을 강요당했으며 우리의 고유의 설날은 관리들의 눈을 피해가며 제례행사를 하였다.
1945년 광복 후에도 양력이 기준력으로 되면서 양력설을 제도화 하고자 하였으나 민족문화란 어느 제도의 힘으로는 바꾸어 놓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중과세라는 명목으로 다시 억제되어 왔다.
우리의 유구한 전통의 “설”은 기구한 운명에 처래 있었으니 일제 강점기에는 우리 설과 일본 설로 광복 후에는 크리스마스까지 끼어서 이중 삼중 과세의 명목으로 양력설과 음력설로 방황하다가 민의가 반영되어 1985년 비로소 민족의 날이라는 어설픈 명칭으로 부활이 되었다. 민속의 날, 농민의 날 등의 이름으로 이어지다가 전문학자들과 뜻 있는 사람들에 의해 언론 매체를 통해 명칭의 타당성 여부가 꾸준히 논의되어 오면서 “민족의 날”혹은 “설날”로 방황하였다. 1986년에 통계조사에 의하면 한국인의 83.5%가 음력과세를 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1989년 2월 1일에야 정부가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을 고쳐 음력 1월 1일을 전후한 3일을 공휴일로 지정, 시행하므로 과거에 양력 과세를 하던 공직자들도 대거 음력 과세로 되돌아 왔다.
법이나 제도가 관습을 앞지르지 못하는 바와 같이 유구한 역사를 통하여 민족혼이 드리워져 있는 우리의 “설”이 양력설로 대체 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설날의 의의(意義)
설날에는 차례(茶禮), 세배 등을 통해서 선조와 후손, 손윗사람과 손아래 사람끼리 혈연 중심의 상하관계에 따른 종적인 체계와 혈연 공동체의 유대를 강화하는 구실을 하였다.
설날이 십이지일(十二支日)로 연결되는 대보름에는 동신(洞神)에 대한 제사와 별신굿 등을 통해서 마을 공동체로서 이웃 간의 횡적인 유대와 사회적 화합과 지역적 연대의식을 강화하는 쪽으로 “설”명절의 의미가 이어졌다.
우리의 “설”은 상하관계와 이웃관계 혈연의식과 지역의식을 가다듬어 생산을 촉진하고 사회를 결속시키고 소속을 재확인시켜주는 명절의 뜻이 가장 풍성하게 나타나는 풍속이다. 1980년대부터 우리의 민족의 설은 실질적으로 부활하고 있었다.
한국 설과 일본 설, 양력 설과 음력 설, 신정과 구정 그리고 이중과세 등으로 억압되던 중에서도 끈질긴 잠재력으로 전승되어온 민족의 “설”이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온 셈이다.
설날의 행사(行事)
설날에는 떡국으로 차례를 올리고 어른께 새배를 하며 덕담(德談)을 들었다. 그밖에도 초하루부터 십이지일인 열이튿날까지의 일진(日辰)에 의해서 털 날인 유모일(有毛日)과 털 없는 날인 무모일(無毛日)로 나누어 설날이 유모일일 때에는 곡식이 잘 익어 풍년이 들며 무모일일 때에는 흉년이 든다고 전하여 진다. “동국세시기”에 보면 상해일(上亥日)과 상자일(上子日)에 궁중에서는 환관(宦官) 수백명이 횃불을 땅위로 이리저리 내저으면서 “돼지 주둥이 지진다”“쥐 주동이 지진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옛날에는 연초에 간지일(干支日)마다 심한 금기가 따랐으나 지금은 약화되거나 소멸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전통적 유습(遺習) 중에는 첫 축일에 솔 안에 놋그릇을 넣어 음식을 데워 먹으면 소가 큰 연장에 다친다던가 척 묘일(卯日)에 여자가 먼저 남의 집 출입하는 것을 금하는 등의 풍속이 어딘가 남아 있다.
정월 상원에 3~4일에 이르는 사이에 동제를 지내는 마을이 아직도 있다. 동제를 지내는 목적은 농사의 풍요와 마을의 평안과 가정의 안택에 있으며 지내는 방법은 마을마다 지방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 명칭도 당산제, 동신제, 동제, 동고사, 당제, 성황당제 등으로 부른다.
상원(上元)은 대보름날로 신농씨(神農氏)에게 풍년을 기원하고 달에게 풍년을 빌며 농사의 풍흉을 점치는 날로 믿었다. 대보름날 아침 일찍이 일어나 귀밝이술을 마시고 “부스럼 깬다”고 하여 알밤이나 호두, 은행 등을 깨물며 일년 열두달 무사태평하고 종기나 부스럼 나지 않게 해주십사 하고 축수를 하였다.
아침 식사는 오곡밥과 함께 쌀을 먹었고 밖에 나가서 친구들에게 더위를 파는 재미도 있었다. 소에게는 오곡밥과 나물을 주어 오곡밥을 먼저 먹으면 풍년이 들고 나물을 먼저 먹으면 흉년이 든다고 전하여진다.
이밖에도 아이들은 정초부터 윷도 놀고 연도 띄우고 제기도 찼다. 정초부터 보름까지 연을 띄우다가 대보름이 되면 연에다 액(厄)자를 하나 써서 자기에게 있는 모든 액을 띄워 보냈다. 이러한 낭만적인 서민 전통문화가 설날부터 정월 대보름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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