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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 김창종의 <포천 이야기> (121)

청덕사와 윤기경목사
포천신문 기자 / jun28258@gmail.com입력 : 2005년 01월 30일


예부터 목민관(牧民官)들은 청사에 길이 빛나는 청백리(淸白吏)로 선정(善政)을 베풀어 백성들에게 어버이 같이 추앙을 받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입신양명(立身揚名)과 부귀영달(富貴榮達)만을 꾀하고 백성들에게 원성을 사는 분들도 많았다.

그러나 내 고향 포천 군내면 용정리에서 출생하여 진주 부민들의 추앙을 받던 윤기경 목사는 신북면 심곡리에 묘가 있어 목민관들의 귀감(龜鑑)이 되고 있다. 윤기경 님은 조선조 문신으로 1664년(현종5년)출생하여 1726년(영조2년 병오4월19일)에 졸하였는데 본관은 파평이고 호는 계안와(計安窩) 자는 장숙(長叔)이다. 1699년(숙종25년)문과에 급제하여 진주목사(晋州牧使)를 역임하고 진주병마절도사(晋州兵馬節度使)로 재직 중 순직하셨다. 다시 말하면 문무(文武)를 겸비한 분이었다.

항상 청렴하고 성실하게 백성을 다스리는 목민관이었기 때문에 진주의 군민들이 청덕사(淸德祠)를 세우고 님의 높은 뜻을 길이고자 매년 제사를 지냈다. 님의 선정(善政)을 베푸심과 청백리(淸白吏)로서의 빛은 여기에 끝나지 않았다. 묘가 신북면에 있는데 묘 조성 당시 유생(儒生)들이 멀리 진주 땅에서 몰려 와 님의 죽음을 통곡하였는데 각기 입고 온 도포 소매자락에는 묘에다 입힐 떼가 있었다.

이 떼는 천리가 넘는 진주 땅에서 진주부민들이 보낸 추앙의 뜻이 담긴 정성의 떼였다고 하니 님이 얼마나 진주 부민들에게 사후까지도 존경과 숭앙(崇仰)을 받았던 목민관이었나를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각 고을마다 고을 입구에는 송덕비나 영세불망비 등이 즐비하다. 탐관오리들이 판을 치던 시절이나 매관매작을 일삼던 시절에는 현직 임관에게도 송덕비를 세우는 일이 있었다.(부끄러운 줄 모르고) 요즈음도 벼슬자리는 근처에도 가지 않았고 반상의 반열에도 오르지 못 했던 천민 출신의 아들이 벼락부자가 되더니 그의 아버지가 죽자 그가 다니던 길가에 서 있던 진짜 송덕비를 그대로 본 따서 「통덕랑 박○○의 비」라고 비석을 묘소 앞에 세워 웃음걸이가 된 일이 있었다.(포천에서) 아들이 운수업, 극장 경영, 사채업을 하여 돈을 벌었다고 하여 그의 아버지가 벼락감투도 분수가 있지 어찌 임금이 내린 벼슬을 사후에 묘 안에서 훔칠 수 있었더란 말인가?

윤기경 목사야 말로 문무를 겸비한 청백리로 목민관의 귀감이 되여 진주시민들의 존경과 숭앙을 받으며 영세불망(永世不忘)의 기념비적 인물이 되었다는 사실은 내 고향 포천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국란을 당하여 흔적도 없이 사라진 청덕비도 복원되어 진주시민들의 존경의 뜻을 되살리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기대를 가져본다.(자료수집에 협조하여 주신 윤형구 종손에게 감사를 드린다. 윤기경 목사에 대한 사료 발굴에 노고가 컸음을 밝혀둔다.)

필자연락처 02-932-2434

포천신문 기자 / jun28258@gmail.com입력 : 2005년 01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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