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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포천한시사 대표 리효종

民族史觀 정립하여 우수한 우리 문화민족의 矜持를 갖자
포천신문 기자 / jun28258@gmail.com입력 : 2005년 01월 20일


리효종
포천한시사 대표


조선왕조실록은 세계유일의 문화유산인 것이며, 우리 한민족의 자랑이다.

수년전부터 중국에서는 고구려와 발해가 주국 민족이 세운 나라라 하고 고구려 역사유적을 많은 예산을 들여 정비하고 있다. 최근에는 유네스코에 건의하여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을 받았고 국민교육에도 열을 올리고 있다. 참으로 기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을 지경이다.

고구려는 기원전 37년에 동부여의 주몽이 졸본부여로 옮겨와서 고구려국을 건국하였다. 이가 동명성왕이다. 그후 국력이 발전하여 서기 400년대 광개토대왕때 전성기를 이루어 만주일대를 정복하고 국경이 산해관까지 이르렀다.

그때 중국대륙에서는 300여년간 삼분오열을 거듭하여 오호 16개국시대를 이루고 있었는데 581년 양견 수문제가 중국대륙을 통일하였다. 당시 수나라의 위세가 천하를 덮었을 때 고구려는 수에 굴복하지 않자 아버지 문제를 죽이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 수양제는 모든 국력을 다하여 세 차례에 걸쳐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을지문덕장군이 지휘하는 고구려군에게 대패하자 국력이 쇠진되어 천하를 통일한지 30여년만에 당나라에게 멸망하고 말았다.

당나라가 중원을 차지하고 나서 당태종대에 이르러 한족이 조선족인 고구려에게 당한 치욕을 씻고자 당태종이 직접 대군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이때 고구려군은 연개소문장군이 지휘하고 있었는데 당나라는 안시성을 공략하다가 안시성주 양만춘장군에게 대패하고 돌아갔다.

한족이 무적의 영주라고 자랑하는 수양제와 당태종이 우리 고구려군에게 당하였던 것이다. 이는 고구려의 명상 을파소 때부터 일어난 선인도랑 사상이 웅건성을 길러낸 강건한 고구려 정신의 발로이었다.

고구려가 수와 당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였다는 기록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명시되었고 당서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중국은 이를 부인하고 오늘날 고구려의 위대한 역사가 한족의 역사라고 우겨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일본은 어떠한가. 서기 414년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광개토대왕의 훈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지금의 길림성 집안현에 광개토대왕비를 건립하였는데 글자가 모두 1,775자가 새겨져 있는데 현재 알아볼 수 있는 글자가 1,534자이다. 이 비문 내용은 상고사 특히 삼국시대의 정세와 일본과의 관계가 적혀 있다.  

이 비가 발견된 것은 1880년경이었다. 동양 제패의 야심을 품고 있던 일본군 참모부가 이 비를 발견하고 일본의 밀정 사카와노부라는 자를 시켜 일본과의 관계가 적혀있는 부분을 마모시키고 석회부도하여 일본에게 유리하도록 변조시켰다. 지금도 그 석회의 흔적이 남아있는데 변조된 부분을 신묘사기(辛卯史記, 339년)라고 하다. 이때 일어난 사건의 기록을 일본이 우리나라 남쪽의 가야국을 침범하여 자기나라 식민지로 만들었다는 소위 임나부경영설을 조작하여 일본국 국사책에 기록하고 지금도 학교에서 이를 가르치고 있다.

임나부경영설(任那府經營說)은 일본이 4세기 중엽부터 6세기 중엽까지 가야국을 정벌하여 한국 남부를 경영하였다는 날조된 식민지사관이다.

당시 4세기때 가야국은 문명 강국이었고 일본은 미개한 상태였다. 서기 375년경 일본에는 글이 없었는데 백제 근구수왕때 왕인 박사가 천자문과 논어를 가지고 일본에 가서 일왕의 태자 응신왕을 가르쳤다고 하는 기록이 일본의 고대 역사책 고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런 일본국이 문명국을 어찌 정벌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일본은 역사를 왜곡하여 자기네 역사를 빛내려 하고 있다. 

또한 한말에 일본세력이 우리나라를 지배하고 있을 때 ‘독도’를 일본의 시마네현이 죽도(竹島)라고 적어놓고 자기네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도 우리의 역사를 살펴 중국이나 일본같이 왜곡을 하지 않을지언정 우리의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하는 것이 국민의 도리일 것이다.

한말 우리의 민족 사학자 창강 김택영 선생은 나라를 잃은 것도 슬픈 일이지만 역사를 잃어버리는 일이 더 큰 슬픔이라 하였다. 자기나라 역사를 잃어버리지 않으면 언젠가는 자기나라를 되찾을 수 있지마는 역사를 잃어버리면 나라를 되찾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나라 역사와 관련하여 벌어지고 있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볼 때 너무 가슴이 아프다.

조선왕조실록은 우리나라 국보 151호로 500년의 왕조사를 편년체의 일기로 빠짐없이 적어서 후손들에게 전한 세계에서 유일한 문화유산이다. 그러함으로 유네스코에서 세계의 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가장 귀중한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우리나라의 정원일기와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로 인쇄된 직지심경, 훈민정음 등이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64개의 세계기록문화유산중 4개종이 우리나라의 것이다. 이는 우리가 문화민족으로서의 긍지를 가질 수 있는 자랑스러운 일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국민의 역사에 대한 무관심과 국가 사회의 지도층 혹은 지식인 집단이 올바른 역사인식이 희박하여 역사를 훼손하는 분위기를 반복하게 하더니 마침내 국민 정서를 오도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국사과목을 폐지하고 고등학교에서는 사회과목에서 더부살이를 하게 하더니 그나마 선택과목으로 전락하고 말은 것이다. 또한 국가의 중추가 될 인재를 뽑는 사법, 행정, 외무고시에서도 배제가 된 것이다.

국사과목을 축소하고 폐쇄한 정부의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정말 기가 막힌다. 수험생들의 노고를 덜어주기 위하여 국사과목을 제외했다 한다. 또 국사를 가르치면 국수주의적인 인간을 양성하게 된다고 까지 하고 있다. 

교육부에서 이런 것이 발의되면 어느 특정부서에서 동조하고 타 부처에서는 나 몰라라 하는 데서 시작되는 우리의 무지한 역사정책은 죄악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이는 국민정서를 훼손하고 제 나라의 역사를 말살하는 정책으로밖에 볼 수 없다.

이웃 일본에서는 자기 나라 청소년들에게 그 민족의 정체성을 일깨어주기 위하여 역사를 왜곡하여 우리의 금관가야가 자기네 식민지라 하고, 독도를 자기나라 영토하고 있으며, 중국에서는 고구려와 발해가 자기들의 핏줄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마당에 우리는 역사를 왜곡하지는 않더라도 우리의 역사를 지키려면 온 국민이 우리 역사를 잘 알도록 역사교육에 주력해야 할 터인데 우리는 국사과목을 없애고 말았다.  이는 창피한 노릇이고 죄를 짓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만들어 후대를 경계했던 이 민족의 후예들이 어찌하여 이런 지경으로 타락하고 있는가. 이 나라 이 민족을 아끼는 지도자들에게 국사교육에 주력하여 우리 민족의 주체성을 찾아 자랑스러운 세계기록문화유산인 조선왕조실록의 정신을 재현하여 주기를 강력히 건의하는 바이다.

역사는 죽어있는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미래로 이어지는 맥락인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이후 오늘에 이르는 60년 세월동안 우리가 가장 소리 높여 외친 말은 일제 35년이라는 원한에 사무친 말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치욕의 35년 보다 더 긴 세월을 주권국가의 국민으로 살았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제국주의자들이 남겨놓고 간 식민지사관 하나 불식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간에 있었던 우리들의 역사인식이 얼마나 때묻고 구겨져 있었으며 얼마나 큰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던가를 알 수가 있다.

아직도 상당한 지위에 있는 지도급 인사들도 조선왕조라는 말 대신 일본제국주의자들이 남겨놓고 간 이조(李朝)라는 비속어를 쓰고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1945년 이후에 출생한 이른바 해방세대들까지 그런 말을 자연스럽게 쓰고 있는 현실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이것이야말로 역사인식이 병들어 있는 기성세대의 전도된 가치관으로 인한 폐해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입증하고 있는 것이며 그들의 지도력 또한 심각한 지경에 있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식민지로 지배당했던 치욕의 35년보다 긴 세월을 주권국가의 국민으로 살았으나 굴욕적이고 수치스러웠던 식민지시대의 대표적 산물인 이른바 식민지사관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으니 이보다 더 한심하고 수치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

이웃나라 한족의 중국은 지난 1,000여년 동안 400년을 거란, 몽고, 여진족에게 침략을 당했다. 나라의 역사든 가문의 역사든 역사에는 반드시 영광스러운 부분과 수치스러운 부분이 공존하게 마련이다. 역사는 비하되거나 거부되어서는 아니 된다.  긍정적이던 부정적이던 꼭 같은 사료(史料)로 적혀 있는 기정사실이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배울 것이 없으면 버릴 것을 배워야 한다. 역사의식은 이렇게 준엄한 것이다. 우리가 역사 앞에서 옷깃을 여며야 하는 연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고려왕조 475년과 조선왕조 517년의 역사를 회고하여 보도록 하자.

고려와 조선왕조 천년동안 중국의 왕조는 6번이나 바뀌었다. 같은 민족이 아니라 다른 민족으로 왕통이 바뀌었던 것이다. 천년간 우리의 왕조가 두 번 바뀌었는데 이민족으로 왕통이 바뀐 것이 아니라 같은 민족끼리의 역성혁명이었던 것이다.

단일 왕조가 500년 동안 그 명맥을 유지했던 예는 세계 문명사를 살펴보아도 찾아보기 어렵다. 유럽에서는 거대하고 강성한 문명국이 많았으나 그 역사가 길지 못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극동지역에 위치하면서 강대한 중국의 모진 간섭과 시달림을 받아오면서도 조선반도에서 500년 동안 같은 왕통을 유지한 두개의 왕조가 있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 기적 같은 일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합당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빈곤한 국가였던 고려와 조선이 대체 무엇으로 왕권을 500년씩이나 유지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을까.

두 왕조는 모두 역사에 대한 외경심을 가지고 강상과 윤기를 치도의 이념으로 삼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도덕국가라는 뜻이다. 도덕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역사에 대한 외경심이 있어야 하며 역사를 정직하게 기록하여 후대에 전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도덕적 용기를 갖춘 언관과 사관들의 직언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개인적인 이해나 소속된 집단의 이해에 얽매이면 직언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직언은 목숨을 내걸어야 한다. 

임금의 면전에서 실정을 입에 담는 용기 있는 모습은 아름답기 그지없는 것이다. 또 그것이 언제 어디에서 있었다고 적어놓는 사관들의 직필에는 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그러한 직필로 임금의 미움을 받아 중형에 처해지기도 하고 때로는 사약을 받고 죽은 신하들도 많았다.  그러나 이 의로운 신하들은 후에 문묘(文廟;성균관 대성전)에 모셔져 아름다운 이름을 영원히 남기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역사를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는 것은 옳은 일은 오래 전하여 실행케 하고 옳지 않은 일은 되풀이되지 않게 하려는 배려인 것이다. 그런 뜻에서 역사를 기록한 책을 통감이라고 거울 ‘감(鑑)’자를 쓴다. 이는 역사가 곧 ‘거울’이라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조실록이 관찬자료라 하여 믿을 바가 못된다고 비방하며 민초들의 삶을 적지 않았다 하여 가치 없는 기록으로 매도하는 얼뱅이 부류들이 대학교단에 서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인 것이다. 이러한 것이 조선왕조실록을 읽어 보지 않은데서 기인된 것이라면 얼마나 한심한 노릇이겠는가.

우리는 역사 앞에서 옷깃을 여밀 줄 아는 외경심을 대단히 소중히 하였다. 조선왕조가 치도의 이념을 주자학을 바탕으로 한 경국대전의 건국이념과 통치철학이 강상과 윤기에 바탕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저 정치를 잘 하려면 반드시 지난 시대의 치란의 자취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 자취를 살펴보려면 오로지 역사의 기록을 상고하여야 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정치상황은 물론 각 도에서 일어난 상황, 일반 백성들에 대한 실정과 천재지변으로 일어난 재해, 풍습, 지리는 말할 것도 없고 궁중의 생활상과 궁녀들의 사생활 형태까지 세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대신들은 말할 것도 없고 임금의 잘못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임금도 왕조실록은 볼 수 없었다. 임금이 실록을 보면 임금에 대한 것을 어찌 기록할 수 있겠는가.

연산군때 무오사화가 일어났는데 이는 당대의 명유 김종직이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고 죽이기까지 한 사건을 고대 중국의 한고조 유방과 초패왕 항우가 천하를 다툴 때 항우가 당시의 황제 의제를 죽인 사건에 비유하여 조의제문을 지었는데 그의 제자 김일손이 이를 사초에 올렸다. 그런데 당시의 세도가 이극돈이 실록에 자기의 비행을 올린 것을 몰래 보고 이를 보복하기 위하여 조의제문을 사기에 올려 세조를 폭군으로 기록해 놓았다고 연산군에게 고해 바쳐 김일손을 비롯한 수많은 선비들을 죽인 사건이다. 또한 당시의 세도가 임사홍이 연산군에게 연산군모 폐출 살해사건을 고해 바쳐 사초를 강제로 보고 당시의 사관과 관련된 관리들을 모조리 죽인 사건이 갑자사화이다.  이 사건 이외에는 어느 왕도 실록을 보지 못하였다.

왕의 잘못된 사건까지 자세히 실록에 올리는 사관(史官)들의 직필에는 머리가 숙여진다. 조선왕조실록은 이러하기 때문에 세계 유일의 기록문화유산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이다.조선왕조실록의 분량은 얼마나 되는 것일까.

조선왕조실록은 1,866권 887책이며 국역본은 413권인데 한 권이 A4용지 300매에서 350매 정도가 된다. 이 국역본을 하루에 100페이지씩 읽는다면 4년이 걸리게 된다. 그 방대함이 어느 정도인 짐작이 될 것이다. 그러기에 세계유일의 문화유산인 것이며, 우리 한민족의 자랑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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