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부터 시작된 “포천탄생 600년” 기념사업이 최근에는 각종 행사가 있을 때마다 축사나 인사말 그리고 지역에서 개최하거나 후원하는 모든 홍보물에 게재되고 있고, 청소년들이 자주 드나드는 도서관을 비롯한 거리마다 동네마다 온통 600년이다.
그러나 국가나 지역이나 자라나는 후세에게는 올바른 역사를 교육해야 함에도, 우리 포천의 청소년들은 영문도 모르고 정리되지 않은 지명역사를 기념해야 한다는 것이 못내 측은하다. 특히 지명은 권력을 가진 일부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닌데도, 충분한 고증도 없이 경솔하게 결정한 연혁위원회의 지명확정도 궁색해 보인다.
지난 2년여의 세월동안 우리지역의 지명연혁이 잘못되었다는 지적을 해오고 있는 필자는, 그동안의 과정에서 실무자의 무능이 애처롭기도 하고, 공부하지 않고 고집을 피우는 지역대표와 행사예산에 연연하여 진정으로 쓴 소리를 해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침묵하고 있는 포천의 현실이 안타깝기도 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포천”이라는 지명이 고려 때부터 사용한 기록이 명확하게 존재하고 있으니,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1권총서 89번째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어 자료를 공개하니 시민의 올바른 판단과 관계자들의 숙고를 바란다.
“요동 공략에 나선 장수의 가족을 볼모로 삼으려하자, 태종이 포천의 가족을 피신시키다” 처음에 신의왕후(神懿王后)는 포천(抱川) 재벽동(滓甓洞)의 전장(田莊)에 있고, 강비(康妃)는 포천(抱川)의 철현(鐵峴)의 전장에 있었는데, 전하(殿下 여기서는 태종을 이름)가 전리 정랑(典理正郞)이 되어 서울(당시 개경)에 있으면서 변고가 발생했다는 말을 듣고 사제(私第)에 들어가지 않고서 곧 말을 달려 포천(抱川)에 이르니, 간사(幹事)하는 노복(奴僕)들이 이미 다 흩어져 도망하였다. 전하가 왕후(王后)와 강비(康妃)를 모시고 동북면을 향하여 가면서, 말을 탈 때든지 말에서 내릴 때든지 전하께서 모두 친히 부축해 주고, 스스로 허리춤에 불에 익힌 음식을 싸 가지고 봉양하였다. 경신 공주(慶愼公主)·경선 공주(慶善公主)·무안군(撫安君)·소도군(昭悼君)이 모두 나이 어렸으나 또한 따라왔으므로, 전하께서 자기가 안아서 말에 태우고 길이 험하고 물이 깊은 곳에는 전하가 또한 말을 이끌기도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24장 A면 (사진자료 참고)
↑↑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1권총서 89번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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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등장하는 요동공략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조선태조 이성계가 4불가론을 천명하며 위화도에서 회군했던 시기인 1388년이니, 시기적으로는 고려우왕 14년이므로 포천지명의 탄생시기가 1413년이라고 우기고 있는 기념사업은 처음부터 다시 고증을 해야 마땅하다고 할 것이다.
앞에 제시한 『태조실록』은 조선 제1대 왕인 태조의 실록으로 표제명은 '태조강헌대왕실록'이다. 태조가 죽은 다음해인 1409년(태종 9)에 태종이 편찬을 명하여 1413년 3월에 완성했으며, 편찬책임자는 하륜(河崙)·유관(柳觀)·정이오(鄭以吾)·변계량(卞季良) 등이었다.
이 기록 『태조실록』의 첫 부분에는 특별히 총서(總序)를 두어 태조 이성계의 고려 말에 활약상과 조선 건국 전야의 사실도 기록하고 있으며, 태조가 치른 각종 전투와 정몽주 살해사건 등에 관해서도 자세히 적혀 있다. 특히 『태조실록』은 『고려사』보다 일찍 편찬되었다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도 높게 평가받고 있다.
그러므로 태조실록은 1409년(태종 9)에 태종이 편찬을 명하여 1413년 3월에 완성했고, 포천시가 주장하는 태종 13년 10월 15일 “군현(郡縣)의 명호를 개편하여 주(州)로 되어있던 많은 군현을 산(山)과 천(川)으로 바꾸었다”는 “계사년의 예”보다도 7개월이나 앞서서 완성된 사초에 의한 실록이므로, 이미 완성된 실록에서 포천지명만 다시 고쳐서 소급하여 적용되었다는 것은 전혀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주장이다.
만약에 포주에서 포천으로 지명을 고쳤다고 주장하는 “계사년에 예”가 1413년 3월에 있었고 태조실록이 10월에 완성되었다면, 어차피 억지 주장이지만 설득력이 일부 인정받을 수도 있겠으나, 5년 전에 시작해서 7개월 전에 이미 완성된 선왕의 실록에서 포천이란 지명만을 소급해서 고쳤을 것이라는 주장은 3류 소설 같은 억지라고 판단된다.
참고로 『고려사』는 김종서·정인지 등이 세종의 교지를 받아 조선시대에 고려시대사를 기전체로 정리하면서 일정한 주관과 제약이 가해진 2차적인 성격을 지닌 사료이며, 1449년(세종 31)부터 시작해서 1451년(문종 1)에 완성하여 1454년(단종 2)에 간행되었으니, 조선『태조실록』은 『고려사』보다 38년이나 일찍 만들어진 기록이다.
그러니 고려시대를 기록한 사료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조선 『태조실록』인 것이다. 더군다나 『고려실록』은 조선 초기『고려사』를 편찬할 때 한양의 춘추관 사고에 옮겨져 보존되었으나 1592년 임진왜란 때 완전히 소실되어 사료가 없는 현재로서는, 임진왜란 이전의 기록이라야 고려에 대한 기록으로 신뢰할 수 있을 것이며, 간행추측시점이 정조 후기 무렵으로 알려진 『문헌고략』으로는 연혁을 논할 가치가 현저하게 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기록에 의하면 포천은 고구려 때 “마홀군(馬忽郡)” 신라 때 “견성군(堅城郡)” 으로 불렸는데, 지방관이 처음으로 파견된 통일신라시대 120군과 305현을 두어, 군에는 태수(太守), 현에는 현령(縣令)을 파견했고, 고려 중기부터 속현에는 감무(監務)를 파견하여 포천에도 감무가 파견되다가 조선 태종 13년 현감으로 고쳐서 파견했으니, 포천이라는 지명도 고려 때부터 이미 사용했고 ‘군’에서 ‘현’으로 된 것이 승격으로 볼 수 없으니 현 승격 600년을 기념한다는 내용은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으나 그것이 잘못된 것을 알았을 때는 즉시 인정하고 시정할 줄 아는 것이 진정한 용기이다. 그러나 사실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고집을 부리고 계속 강행하며 대세를 운운하는 것은 원만한 행정조치로 보기 어려우니, 조금 속이 상하더라도 “포천탄생 600년”은 처음부터 다시 고증을 해야 옳고, 기념사업은 명칭을 바꾸어 시행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