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생/각-질화로

조귀순(포천시 가산면 출생, 수필가)

옛날 우리 집에는 화로가 두 개 있었다. 하나는 무쇠로 된 것이고 또 하나는 질화로이다. 아버지께서는 반영구적인 무쇠화로를 놔두고 겨우내 질화로만을 쓰셨다. 그 시절 마을에는 질시루와 자배기를 굽는 가마가 있었다. 보름에 한번씩 가마를 굽는데, 그 때마다 잘못 되어 일그러진 것이 몇 개씩 나왔다. 그것을 공것으로 얻기가 수월해서였을까?
“화롯불은 쑤석거리지만 않으면 오래 간단다.”
아버지는 새벽마다 장작불을 지펴 소여물을 끓이셨다. 그리고 화롯불을 담아놓아 온종일 방안이 훈훈하였다. 어느 집은 외풍 때문에 코가 다 시리다고도 하지만 우리 집은 화롯불 덕분에 늘 따뜻했다. 또 화롯불에 고구마를 묻어 두셨다. 방학 때는 늦잠을 자다가도 노릇노릇하게 익어 가는 고구마의 냄새에 이끌려 일어나곤 했다.
두어 시간쯤 썰매를 타고 놀던 날이다. 돌아오다 보니 친구의 엉덩이가 둥그렇게 젖어있었다. 몇 번씩 엉덩방아를 찧었으니 젖을 만도 했다. 노느라 몰랐는데 이제 어머니께 꾸지람을 듣게 될까 봐 울상을 지었다.
그 때 문뜩 우리 집의 화롯불이 떠올랐다. 친구네 집은 일찍이 연탄아궁이로 개량을 하여 화롯불이 없었다. 우리는 신발이 툇돌 위를 벗어나 나동그라지는 것도 모를 만큼 정신 없이 뛰어 들어갔다. 방안이 훗훗한 걸 보니 우선 안심이었다. 그러나 얄궂게도 그 시간이 저녁때라 불이 거의 다 사그라졌다. 부젓가락으로 가물 가물대는 화롯불을 온통 파 헤쳤다. 뿌연 재티가 코를 훌쩍거릴 때마다 빨려 들어가고 눈썹 끝에 매달렸다. 그것을 손등으로 쓰윽 문지르고는 잘잘한 숯덩이를 찾아 모았다. 한껏 바람을 들이마셔 양 볼로 바람의 세기를 조절해 가며 불었다. 검은 숯이 조금씩 빨개졌다. 벌겋게 물들어 가듯 번져 가는 불빛이 정말 아름답다고, 불은 바람을 몹시도 좋아하는가 보다 라고 그때 처음 생각했었다.
곱은 손은 겨우 녹았지만 바지 엉덩이는 여전히 축축하였다. 친구는 아예 엉덩이를 화롯불 쪽으로 둘러댔다. 무릎을 반쯤 구부린 채 엉거주춤한 자세로 엉덩이를 들이밀었다. 엉덩이에서 김이 무럭무럭 나는 것을 보니 절로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러다 반쯤 구부린 오금의 힘이 빠지고 얼었던 몸도 스르르 풀려서 일까? 친구는 그만 화롯불에 살짝 주저앉았다. 너무 놀라 통통 뛰었다. 바지엉덩이를 요란스레 털며
“야아. 내 바지, 바지 어떻게?” 하고 외쳤다. 그런데 나는 화로는 어떻게 하느냐고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 어려움이 닥쳤을 때 진심이 나온다더니 만…. 서로 자기 생각만 하였다.
때마침 마을 사랑방으로 마실 가셨던 아버지께서 돌아오셨다. 우리는 어쩔 줄 몰라 어정쩡하게 서있었다. 아버지는 습관처럼 화롯불을 당겨 불을 살피시더니,
“오늘 아침엔 참나무장작을 놔두고 마들가리를 지폈더니 화롯불이 오래 가질 못 했구나. 잠깐들 있어라. 내 어서 나가 소죽 쑬 테니.”
하시고나가셨다.
“휴우 ∼ , 이 화로가 깨졌으면 어떡했을까.”
아버지께서는 새 질화로를 그냥 사용하지 않으셨다. 안쪽에는 붉은 진흙을 얇게 발랐다. 몇 번씩 굽지만 장작불이 계속 닿으면 깨지기 쉬워 오래 쓰려는 것이다. 건넌방 구석으로 밀어놓은 무쇠화로는 화로 춤의 모서리가 날카로웠다. 손잡이도 각이 져 있어 놀다가 머리라도 부딪히는 날엔 밤톨만한 혹이 났다. 그래서 어머니는 먼저 헝겊으로 양손잡이를 모두 싸맸다. 쇠붙이는 차가워 늘 냉냉한 느낌이었다. 흙으로 빚은 질화로가 따뜻한 성품을 만들어 준다는 부모님의 뜻은 나중에 알았다.
이 밤, 그윽하고 훈훈한 아버지의 정취와 나의 향수가 물씬 배어 있는 은근한 화롯불이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