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인간은 나름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을 때 존재의 의미가 있다. 각자가 자신이 속해있는 혈연적, 지연적, 학연적 공동체를 귀중하게 생각하는 것도 그런 연유이다. 즉, 인간은 자신을 키워준 인연에 대해서 나름의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그의 존엄성을 획득하고자 하는 것이다. 특히 예술가들은 작품 속에서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면서도 그가 속한 지역에 대해서 면밀하게 관찰하고 작품의 소재로 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일상의 모습이나 자연 경치, 지역문화에 대한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작품화함으로써 당대의 지역문화의 귀중한 예술적 자료를 남길 수 있다. 필자는 요즘 운천의 정기모 시인의 시평을 쓰면서 그가 가진 공동체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주의적 작품에 많은 감명을 받았다. 그것은 예술적 가치만큼이나 지역사회에 대한 강한 애착을 진솔하게 보여주는 시인의 자세를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정기모 시인은 경기도 포천에 사는 농부시인이다. 그는 오랜 군생활을 마치고 은퇴하여 제2의 고향인 운천에서 농사와 낚시를 하면서도 시와 그림을 즐기고 산다. 시인이 하사관으로 군인의 길을 걸어왔다 하더라고 그에게서 군인이라는 직업상 가지는 경직성을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삶의 고통을 특유의 풍자와 절제로 극복하고자 예술적 장르에 문을 두드리고 있다. 그가 운영하는 상점의 한 구석에는 묵화를 그릴 수 있는 간이 화실이 있다. 그는 운천을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산야를 수묵으로 그리며 독특한 시각으로 자연을 그리고 있다.
그는 그림에 못지않게 시에 대한 정열이 남다르다. 마치 삶의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그 의미를 찾기 위해 마치 구도하듯 시에 매달리고 있다. 정기모의 시세계는 매우 사실주의에 근거한다. 그가 전원생활을 한다고 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감상적으로 예찬하는 시는 찾아볼 수 없다. 그가 시적 소재로 삼는 자연의 사물에는 자연 그 자체보다는 그 사물을 관계하는 인간의 손길과 감정이 개입된다. 그가 농부로서 함께 고락을 함께하는 고추, 콩, 도마도 등에는 인간적인 땀과 노고가 들어있다. 그는 그 자연물에 시인의 감정을 이입하고 희로애락을 절제 있게 표현한다. 그러므로 그가 전원과 자연을 다룬다 하더라도 결코 도회시인들이 전원에 대한 동경에서 노래하는 전원시와는 완전히 맥을 달리하는 사실주의적 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정기모는 사실주의자로서 감정을 최대한 절제하고 있지만, 객관적인 시선 아래에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에 대한 휴머니즘이 자리하고 있다. 농부이자 서민으로서 삶의 고통이 종종 침투하고 술을 좋아하는 그를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고 있는 아내에 대한 깊은 애정도 많은 시에 묻어나온다. 또한 그는 자타가 인정하는 낚시의 고수이기도 하다. 그는 낚시를 하면서 물고기를 낚는 강태공 같은 고고함과 서정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는 시를 특별한 영감에서 쓰기 보다는 그가 일상생활을 하면서 느끼는 소탈한 소시민적 느낌을 짧은 단시로 옮겨놓는다. 그가 좋아하는 시의 틀로서 단시는 일상에 대한 사실적 묘사를 탄탄하게 응축시키는 효과를 낸다. 자칫 초보자들이 범하는 과도한 수식이나 시어의 나열은 가장 금기시하는 것이 정기모 시의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정기모의 사실주의적 전원시는 그의 날카로운 관찰력에서 시작된다. 그의 전원시의 배경은 엄청난 숲이나 평원이 아니다. 운천에 있는 그의 집 뒤뜰에 큼지막한 밭이 있으며, 그곳에 철마다 고추, 도마도, 콩, 파 등을 심는다. 그는 자신이 땀을 흘리며 경작하였던 작물을 단순한 채소라는 농산물로만 여기기 않는다. 그 채소들이나 그것들과 함께 지내는 고양이에게 인간적인 감정이 흐르는 것을 시심으로 잡아낸다.
텃밭에 초겨울 한파가 밀려오자 갑자기 파장이 된 장터인양 무언가 한기를 느끼는 시인은 생기를 잃은 배추밭의 움츠려든 사물들에 대해서 객관적인 시선을 가져간다. 시인은 한파라는 자연적 기후변화에 의해서 급격하게 변화된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리면서 “배추밭에 내린 한파주의보/파랗게 질린/대파고랑 틈/웅크린 고양이 는/발이 시러워라”(‘한파’ 부분)라고 노래한다. 그의 시는 한파가 가져온 생명체들의 위축된 모습을 순간적으로 포착한 스냅샷 같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시인은 이러한 사실주의적 사진찍기 수법을 ‘첫눈’이란 시에서도 적용한다. 흰 눈으로 덮혀있는 김장배추를 “이불을/뒤집어쓰고” 있다고 표현하고 큼직한 무들도 “팔뚝 무/비닐을/지붕 삼았다”라고 담백하게 그리고 있다. 하지만 정기모는 자신과 함께 계절의 애환을 함께 해온 사물들이 마치 자신이 살아온 삶처럼 팍팍하면서도 정겨운 농부의 표정과 오버랩 시키면서 독특한 서정성을 물씬 풍겨주기도 한다.
콩깍지나 고춧대는 이제 결실을 인간들에게 다 주어버리고 버려지는 물질로 마치 긴 노동이 끝나고 파김치가 되어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며, 그 모습이 애처로워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이다. 이렇듯 포천의 모습을 진솔하게 노래하는 예술가들이 많을수록 그 문화가 풍요로워지고 고향에 대한 사랑 또한 샘솟아 오르리라 믿는다. 정기모는 ‘농부’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회원가입
기사쓰기
입력 : 2013년 03월 19일 
트위터
페이스북
밴드
카카오스토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