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놀라게 만드는 사건·사고 중 빠지지 않는 것이 청소년 범죄이다. 폭력, 우발적 살인, 성폭행 등이 이들이 저지르는 범죄의 주요 목록이다. 언젠들 이런 사건이 없었겠냐 하지만 요즘은 점점 그 빈도와 강도가 더해지고 있어 실로 심각한 문제이다. 요 며칠 사이에도 우리를 놀라게 만드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 ‘무서운 아이들’이란 생각을 금치 못하게 하는 사건들이 또 발생하였다. 다시 어린 학생을 죽음으로 내몬 경산의 학내 폭력 사건과 원주에서 발생한 초등학생들의 지적장애여성 성폭행 사건이 그것이다.
‘무서운 아이들’이란 표현은 원래 프랑스의 문인이자 영화감독인 장콕토가 세상의 관습에 저항하고 덧없는 삶을 사는 아이들을 그린 그의 소설 제목에서 비롯하여 하나의 유행어가 된 용어이지만 요즘 우리 사회에서 청소년들이 일으키는 사건 사고들은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그저 말 자체의 의미 그대로 ‘무섭다’라는 의미에 부합하는 행위들이다. 초등학생들이 성인인 지적장애여성을 성폭행했다는 보도에는 우리 사회가 어떻게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지 기가 막혀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실상 아이들이 무섭다는 것은 근래에 들어 느끼는 일도 아니고 나만의 감상도 아닐 것이다. 좋아진 영양 공급으로 아이들은 언제부턴가 체격이 어른들을 능가하기 시작했고, 신자유주의 이념의 풍미로 약육강식의 경쟁이 판치게 되자 도덕이나 윤리가 약화된 세계에서 덩치가 커진 아이들의 비행은 어른들이 두려워하는 수준으로 악화되어 왔다. 이런 상황에서 아이들은 자신들의 비행을 나무라는 어른들에게 대들고 어른들은 괜히 나서서 피해를 자초할 것이 없다는 무기력한 회피로 청소년들의 비행은 더 심해지는 양상이다.
일 년 전쯤 고교 교사의 특강을 들으러 갔다가 고교 화장실을 들른 적이 있는데 화장실은 담배꽁초와 담뱃재로 뒤범벅이 되어 발 디딜 데가 없을 지경이었다. 교사들에게 어째 이러냐 했더니 심지어 여학교까지도 그렇다면서 방기하는 모양새였다. 학생들 사이의 폭력도 알면서도 모른 체 덮어둔다는 교사의 고백 ― 이미 알고 있지만 그 실상을 직접 육성으로 접하니 더 충격적인 한 일간지의 보도도 있었다. 사정이 이렇다 해서 교사들만을 비난할 수만도 없는 것이 우리의 문제적 현실이다.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청소년 문제는 우리 사회 전체가 나서야 할 만큼 악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을 쓰는 오늘도 저녁 뉴스에는 중학생 아이들이 하교길에 한 아이를 공공연히 왕따시키고 괴롭히는 장면이 그대로 옮겨진다. 말도 못하고 바보같다는 이유로 한 이이를 집단적으로 괴롭힌다는 거였는데, 더 기막힌 것은 인터뷰를 요청하는 취재진에게 “저 자식 좀 때려주고 인터뷰하면 안 되냐”고 반문하는 아이들이었다. 이건 뉴스가 아니라 영화 속의 한 장면인가 싶을 정도였다.
이처럼 도를 넘는 청소년들의 비행을 막으려면 아이들에 대한 징계도 징계지만 늘 하는 이야기다 싶어도 우리 사회 전체의 모순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 중에서도 나는 ‘정의(正義) 교육’이 다시금 시대의 명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요즘같은 시대풍조에 정의를 들고 나서면 왠 돈키호테냐 할 것이다. 난마같이 얽힌 시대에 정의가 이전처럼 손쉽게 정의(定意)될 수도 있는 사정도 아니고, 고전적 정의감으로 나서다간 괜히 봉변을 당하거나 주제 넘는 짓이라 손가락질이나 받기 십상인 탓이다.
마이클 샌델 교수가 지난 해에 ‘정의론’으로 우리 사회에 센세이션을 일으킨 것은 아마도 이처럼 정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거나 부족한 우리 사회의 정의감 결핍에 따른 갈증의 반영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샌델 교수의 정의론도 기대만큼 우리들의 갈증을 충족시키진 못하였다. 그의 정의론은 ‘정의란 정의하기 어려운 것, 구성원들의 거듭된 토의와 심사숙고에 따른 합의’ 정도로 마무리되었다.
물론 나 역시도 기사도를 발휘하여 모든 불의에 맞설 수 있는 배짱도 없고 나의 정의가 타인에게 독선으로 비치는 가능성을 항상 가지고 있는 탓에 정의란 이런 것이고 이것을 지키자고 소리치기는 계면쩍다. 그러나 적어도 아이들에게 ‘약자를 괴롭히는 것은 정말 비겁한 일이고 이것은 동물이 아닌 인간이라면 해서는 안 될 짓’이라는 사실쯤은 분명히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를 국민의 도덕률로 생활화시키고 이를 어길 시에는 지위와 연령의 고하를 막론하고 엄정한 징계를 피할 수 없음을 주지시킨다면 만연한 학교 폭력, 초등학생마저 지체부자유자를 성폭행하는 기막힌 일은 벌어지지 않을까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리고 청소년 비행을 ―막기 보다― 줄이기 위한 방책으로 가정교육의 중요성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요즘은 자녀수도 적고 엄격한 자녀 교육은 아이들 기를 꺾거나 비민주적인 것으로 인식되어 인성 교육에 있어서는 가정에서부터 거의 방임상태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요즘 부모들은 아버지는 친구, 할아버지조차도 다정한 어른이 되어 줘야 민주적이고 앞서는 어른이 될 수 있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것 같다.
물론 자녀들이 아버지와 친하고 할아버지와 정이 도타워야 할 것은 두 말할 나위없다. 따뜻한 가족애야말로 자녀들 인성교육의 근본바탕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여도 자녀들의 잘못은 따끔히 나무라고 안 되는 것은 안 된다 말하는 어른이 없으면 예절교육과 시민교육의 바탕이 허물어진다. 자녀와 친하면서도 자녀들이 욕망을 조절하는 법을 엄히 가르쳐야 사회가 바로 선다. 교사들이 학생들을 지도하기 버거워하는 현실에서 부모들부터 나서지 않으면 안되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