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이성계가 개성(송악)에서 한양으로 도읍을 옮길 때 무학대사와 정도전 간에 궁의 방향을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고 한다. 야사이기는 하지만 선조 때 대문장가인 차천로(車天輅)의 『오산설림(五山說林)』에는 “무학대사가 한양의 세(勢)를 보고, 인왕산은 주산 즉 현무로 하고 남산과 북악을 백호와 청룡으로 하여 도읍을 동향, 즉 유좌묘향(酉坐卯向)으로 하자”는 의견을 냈다고 한다.
그러니까 인왕산을 현무로 하는 유좌묘향(酉坐卯向)으로 하면 왕업을 영원히 전할 수가 있으나, 자좌오향(子坐午向)으로 하면 관악산을 정남쪽에 두게 되어 그 화성(火性)에 궁이 눌려서 앞으로 내우와 외환이 그치지 않을 것이라며 인왕현무설을 예언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삼봉(三峰) 정도전은 자고로 『주례(周禮)』에 의하면, 제왕은 남면(南面)하여 다스리는 것이지 동향을 한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하며 난색을 표하며, ‘예로부터 군주는 남쪽을 바라보며 정사(政事)를 펼쳐야 하는 만큼 궁궐을 남향, 즉 임좌병향(壬坐丙向)으로 하여 백악 현무, 인왕 백호, 낙산(駱山) 청룡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관악산은 정면에 있지만 멀리 떨어져 있고 한강이 가로막고 있으므로 화기가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반론을 폈던 것이다.
아무리 무학대사가 왕의 스승인 왕사(王師)였지만, 당시 신진사대부 세력을 대표한 정도전을 꺾을 수는 없었기에 결국 조선의 정궁은 정도전의 의견을 좇아 북악(北岳) 아래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 후에 궁의 이름을 짓게 되는데 유학경전인 『시경(詩經)』에 「대아(大雅)」편에 술에 취한다는 의미인 '기취(旣醉)'라는 시(詩)가 있어, 이 시에는 "기취이주 기포이덕 군자만년 개이경복(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이라는 구절이 전해진다.
번역하면 "이미 술에 취하고 덕에 배부르니. 군자는 만년토록 큰 복을 누리리라."라는 뜻이니, 음식과 덕(德)에 배부른 태평한 세상을 만드는 성군(聖君)이 끊임없이 나와서 만세(萬世)토록 번영을 누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시의 마지막 '경복(景福)'이라는 두 글자를 받아들여서 궁의 이름을 경복궁(景福宮)이라 이름 짓게 되었다는 것이다.
궁궐을 짓고 동서남북으로 성문을 만들게 되었는데, 동쪽의 문은 흥인지문(興仁之門), 서쪽의 문은 돈의문(敦義門), 남쪽의 문은 숭례문(崇禮門), 그리고 북쪽은 성문은 이에 따르지 않고 숙청문(肅淸門), 혹은 숙정문(肅靖門)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이렇게 논란 속에서 많은 공을 들이며 도성은 축조되었고, 그 중에서도 삼봉 정도전은 무학대사의 주장이 마음에 걸렸던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남쪽의 성문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게 되는데, 다름 아닌 도성 남쪽에 있는 관악산에 불의 기운이 도성 안에 그대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에 대한 것이었다.
원래 성문의 현액(懸額) 글씨는 가로로 쓰는 것이 관례임에도 세로로 쓰게 하였는데, ‘숭(崇)’은 불꽃이 타오르는 모습을 본뜬 상형문자이고, ‘예(禮)’란 글자를 오행(五行)으로 따져보면 화(火)에 속하니 화를 오방(五方)으로 따지면 남(南)에 해당한다.
이렇듯 숭례(崇禮)라는 것은 ‘남쪽에 불을 지른다’는 뜻으로 정확하게 말하면 관악산에 불을 지르겠다는 뜻이 되고, 글자를 세로로 쓴 것은 불이 더 잘 타는 모습이니 ‘이화제화(以火制火)’로 관악산 화기에 대한 맞불작전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남대문 바로 앞에는 남지(南池)라는 인공연못까지 조성해 관악산에서 넘어오는 화기를 막고자 했다.
또한 흥선 대원군은 불에 탄 경복궁을 300년 만에 중건하면서 관악산의 화기를 막기 위해 돌로 해태를 만들어 광화문 앞에 배치했고, 관악산에 우물을 파고 그 안에 구리로 만든 용(龍)을 넣기도 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북쪽의 숙정문의 경우에는 비록 북쪽에서 내려오는 지맥을 손상시킨다고 하여 출입하는 일은 별로 없었으나, 물의 기운이 강하다고 하여 가뭄이 들면 문을 개방하고 비가 많이 내리면 문을 닫았다고 기록도 전한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인 1934년에는 일본이 '남대문'으로 문화재로 지정했지만, 1996년에 역사바로세우기 사업의 하나로 일제가 지정한 문화재에 대한 재평가작업을 하면서 '숭례문'으로 명칭이 환원되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 2008년 2월10일 오후 8시50분경에 발생한 방화로 불에 타서 원형이 소실되었고, 이로 인해 국민의 마음도 화마에 떨어지는 목재와 함께 무너져 내렸으니, 모두의 염려와 기원 속에서 5년 동안의 복원공사를 통해 시민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고 하니, 화마에 상처받은 마음을 쓰다듬으며 그 모습을 기다려 본다.
이 희 용 / 대진대학교 동양철학 박사과정, 시인, 연극연출가, 제3대 포천시예총회장, 광릉숲생태문학회장, 한국스카우트경기북부연맹 감사, 전 경기도예총부회장, 포천시수능시험장유치추진위원장, 포천신문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