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는 후각의 전유물만은 아니다. 펜촉에서 흘러나오는 향기일 수도 있다. 서랍에서 만년필을 꺼낸다. 아내가 일본 여행 갔다가 사온 내 생일 선물이다. 아내가 여행을 떠나기 직전, 나는 혼잣말로 “부담 없이 쓸 수 있는 만년필 하나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무심했던 아내는 예상을 깨고 좀 부담스러운 만년필 하나 사왔다. 나한테 말 한마디 없이 사왔다. 이왕이면 한 번쯤 물어보고 사오면 어디 덧나느냐고? 아쉬움이 진하다. 아내가 사온 만년필은 글씨가 굵고 컨버터가 없는 서명용 만년필이었다. 나는 카트리지보다는 컨버터 만년필이 좋다.
4년의 시간이 흘렀건만 아직도 만년필만 꺼내면 솔직히 아쉽다. 상의 없이 사온 만년필에 대한 서운함이다. 만년필도 천차만별이지만 내가 좋아하는 만년필을 가질 때만이 뿌듯해지는 것이다. 나에게는 이번에 아내로부터 선물 받은 만년필 외에도 만년필 두 자루가 더 있다. 만약 내 만년필을 잃어버린다면 어떤 마음일까, 생각만 해도 속상한다. 하잘 것 없는 볼펜 하나 잃어버려도 속이 상하는데 만약, 내 만년필을 잃어버린다면 속이 쓰려 탈날 것이 분명하다.
만년필도 오래 쓰다보면 세월이 버거운 듯 촉이 닳는다. 촉을 바르다가 그만 촉을 망가뜨렸다. 아까워서 버리는 것조차 망설여진다. 눈 딱 감고 쓰레기통에 만년필을 툭 던져버렸다. 그러다가 쓰레기통을 뒤져 만년필을 도로 찾아내 분해해서 컨버터만 챙겼다. 행여나 부품 하나라도 필요할 때가 있을 것 같아서였다. 지금은 만년필 부품 하나만은 구하기 어렵다. 부품 하나 때문에 새 만년필 한 자루를 사야 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보름 전, 펜촉 하나 구할까 해서 남대문시장을 다녀온 적이 있다. 만년필 취급하는 상점을 어렵사리 찾았지만, 망가진 만년필을 챙겨가지 않아서 헛수고만 하고 그만 되돌아왔다. 나는 어떤 물건에 한 번 마음이 끌리면 끝까지 집착하는 버릇이 있다. 좋은 버릇인지 나쁜 버릇인지 가늠하기는 쉽지 않지만, 집착 때문에 손해를 좀 보는 편이다. 손에 넣고 조몰락거리다가 망가뜨리는 것이다. 만년필 외에도 망가뜨린 물건이 더 있다. 결국은 망가뜨려 경제적 손해를 입고 속 상해하면서 어쩔 수 없이 새 물건을 구입하는 것이다.
아날로그 시대가 막을 내리고 디지털 시대와 멀티미디어 시대가 찾아왔다. 그런데도 나는 현대에 따르지 못하는 아날로그를 찾고 있는 것이다. 현대문명이 서운해 할 것 같다. 볼펜과 샤프펜슬의 편리함에 만년필은 서서히 밀려났고, 컴퓨터가 일상화되면서 만년필은 세상 사람들의 추억에 묻히는 듯 멀어졌다. 펜을 사랑하는 문인들조차도 컴퓨터로 시 쓰고, 수필 쓰고, 소설 쓰고 한다. 만년필은 품격 있는 필기구임에는 틀림없다마는 현대인은 좀 번거롭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만년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만년필 때문에 잊혔던 추억이 하나가 되살아나는 것이다. 만년필이 최고의 선물인 중학생 때였다. 입학이나 졸업 때, 아니면 생일 선물로써 이만한 선물은 없었다. 중학교 시절만 하더라도 만년필 가진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만년필이 아닌 펜대를 움직여 노트에 써내려갔다. 그때의 빛바랜 펜촉의 무딘 감정의 소리가 사각사각 들려오는 듯하다. 만년필 하나 가지는 것이 그때 나의 꿈이었다. 꿈꾸는 자에게 꿈이 이루어지듯 나의 꿈은 아마 고등학교 고학년 때 이루어지지 않았나 싶다. 국산품 파일럿 만년필 한 자루 사고서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 그때 내 얼굴이 설핏하여 미소를 지어보곤 한다.
중학교에 갓 입학하고 첫 수업 받는 날이었다. 내 짝꿍은 읍내 초등학교를 나와 전체 1등으로 입학한 고상한 친구 L이였다. L은 늘 초록색 잉크만 사용했다. 노트에 한 줄 한 줄 예쁘고도 반듯하게 써내려가는 펜글씨에 매료되어 그 친구가 얼마나 부러웠던지 모른다. 나는 그의 손에 쥔 펜대만 훔쳐보곤 했었다. 만년필 하나 있었더라면 친구 L은 더 좋은 글씨로 거듭 태어났으리라. 나는 짓궂은 친구와 함께 쉬는 시간에 장난치다 펜대가 부러지기도 하고 펜촉에 찔려 손등에 피멍이 들기도 했다. 잉크를 엎질러 책과 노트가 까매지고 손바닥에는 잉크가 시퍼렇게 묻었다.
그 후 세월이 한참 흘러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생도생활을 마치고 육군소위로 임관해서 전방에서 군대생활 할 때였다. 이때쯤 중동에 돈 벌로 갔던 매형이 귀국했다. 그때 파카 만년필 한 자루 사 오셨다. 매형이 처남에게 내민 귀국 선물이었다. 나는 만년필 선물 받고 참 좋아했다. 여학생들에게 위문편지 답장 쓰고, 펜팔 쓰던 사랑의 만년필이었다. 그 만년필 향기가 아직껏 가슴 한쪽에 남아 있는 것이다.
나는 한 자루 만년필을 통해 펜의 역사를 기원하기도 한다. 인간의 본능적인 표현의 욕구 덕분에 인간은 만물의 영장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이것의 일등공신은 바로 도구를 사용하여 사고와 언어능력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데서 찾을 수 있다. 펜의 뿌리는 단순한 동식물의 줄기나 깃털이 아닌 신이 인간에게 내린 창조의 최고선물이라 생각한다. 나는 ‘펜이 칼보다 강하다’라는 말을 믿는다. 역사를 기록하고 지혜와 문화를 창달 창조하며 지식을 전달하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때 펜은 위대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 위대한 힘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이기도 하다.
펜은 그윽한 향기를 품고 있다. 만년필 안에 걸쭉한 잉크를 가득 채울 때면 마치 내 몸 안에 기를 받는 것처럼 힘이 마구 솟는다. 하얀 원고지 위로 시 한 수 써내려 가면 사각거리는 소리에 오묘함마저 배어나온다. 세상이 온통 기계화되고 복제 되어 개성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사라지지 않는 인간의 향기를 펜촉에서 찾고 싶다. 강하면서 부드러운 부드러우면서 강한 양심으로 밝은 세상을 써내려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