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떤 일을 도모(圖謀)할 때 명분(名分)을 따진다. 명분이 있어야 떳떳하기 때문이다. 명분은 글자대로 풀이하면 ‘이름과 분수’라는 뜻이다. 명목(名目)에 나타나 있는 대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나 분수를 이른다. 이를테면 공자(孔子)가 말한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와 같은 것이다. 임금 노릇 하는 사람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노릇 하는 사람은 신하다워야 하며, 부모노릇 하는 사람은 부모다워야 하고, 자식노릇 하는 사람은 자식다워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사회 기강(紀綱)이 무너지고 반인륜적(反人倫的)인 범죄가 만연(蔓延)하는 것은 명분이 바로 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각자의 위치에서 맡은 바 직분을 다하면 명분은 자연히 바로 설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오늘의 서글픈 현실이다. 어떤 이는 명분을 앞세워 이익을 꾀하려 구실(口實)을 찾는다. 명분이란 이름으로 구실을 감싸려 한다. 구실이란 어떤 일을 하기 위해 겉으로 제시하는 이유나 핑계꺼리를 말하는 것이다. 구실이 명분이 되어서는 안 된다. 명분은 당위성(當爲性)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이다.
당위성이란 모든 사람 앞에 당당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언가 뒤가 구리면 안 되는 것이다. 마음이 찜찜하면 안 되는 것이다. 누가 알게 될 가봐 쉬쉬하면 안 되는 것이다. 전전긍긍(戰戰兢兢)하면 안 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수긍(首肯)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끼리끼리만 알면 안 되는 것이고 모의(謀議)당사자들만 알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구실이요 변명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利)를 보면 의(義)를 생각하라 했다. 義는 宜와 통하는 말이다. 宜는 당위성[宜當]과 통하는 말이다. 의당(宜當)과 통하는 말이다. 이익(利益)이 생긴다고 덮어놓고 좋아 하기만 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당위성을 생각해야 한다. 무언가 찜찜하다는 생각이 들면 그리 하지 말아야 한다. 나로 인해 누군가 부당하게 손해를 보는 일이 생긴다고 생각되면 재고(再考)해야 한다. 다시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부머랭(boomerang)이 되어 되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위성을 찾고 명분을 찾는 것이다.
적반하장(賊反荷杖)이란 말이 있다. 도둑이 오히려 매를 든다는 말이다. 잘 못한 사람이 도리어 잘한 사람을 나무란다는 말이다. 당위성을 말하는 사람을 오히려 외골수라고 몰아붙이는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 진리는 다수결(多數決)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그리 주장(主張)한다고 그것이 반드시 바른 길은 아니기 때문이다. 당위성이라는 잣대와 명분이라는 잣대를 놓고 보면 그게 아니기 때문이다. 당위성은 진리(眞理)를 바탕으로 한다. 중정(中正)을 바탕으로 한다.
중정이란 정 중앙을 말하는 것이다. 좌우상하(左右上下)로 조금도 기울지 않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기울면 그것은 중정이 아니다. 그래서 모든 기준(基準)이 되는 것이고 잣대가 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똑 같이 적용되는 잣대가 되는 것이다. 똑 같이 적용되기 때문에 당위성을 갖게 되는 것이고 명분을 갖게 되는 것이다. 중정은 마음의 잣대가 아니다. 자연의 잣대이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잣대가 아니란 말이다.
마음은 가변성(可變性)이나 자연은 불변성(不變性)이기 때문이다. 마음은 이랬다 저랬다 할 수 있는 것이나 자연은 그렇지 않다. 자연은 이랬다 저랬다 할 수 없는 것이다. 아니 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 앞에 겸허(謙虛)해 하는 것이고 외경(畏敬)스러워 하는 것이다. 아무리 왕후장상(王侯將相)이라 해도 자연을 거슬러서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요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명분을 구실삼아 이익을 도모하려 하고 있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당위성을 뒤로 하고 이익에만 급급해하고 있는가? 되돌아보고 자성(資性)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