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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용 칼럼] 맹자의 민본사상(1)


이희용 기자 / heeyeong1@hanmail.net입력 : 2012년 12월 19일
↑↑ 이희용 칼럼니스트, 포천신문 자문위원
ⓒ (주)포천신문사
현실적으로 한국사회는 사상의 형성과 실행과정이 서양학문에 의존됨으로 인해 정치사상마저 만성적인 피폐의 늪에 빠져서, 독자적인 정체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으며 우리가 물려받은 전통적인 사상적 자원이 무시당하고 있음이 안타깝기도 하다.

그래서 공자의 정통유학을 계승 발전시켰고 공자 다음의 아성(亞聖)으로 불린 맹자(孟子)의 사상을 정리하여, 그가 내세운 백성에 대한 통치자의 의무를 강조 했던 언행과 학설을 떠올려 깊어가는 민생의 골짜기를 전혀 돌보지 않고 있는 현실을 직시해 본다.

맹자가 생존 했을 당시는 기원전 372년에서 기원전 299년 사이로 보고 있다. 이때는 제후국 들이 서로 패권을 다투며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던 전국시대 중기이며, 이때는 주나라 사회를 지탱하던 봉건제도는 와해되던 시기였다. 이런 통치체제의 붕괴는 상류계층의 통제수단이었던 종법제도가 붕괴되었고, 이로부터 새로운 질서의 형성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맹자가 살던 전국시대 중기는 군주가 국가의 권력을 장악하고 행사하면서 분열된 소국들이 점차 통합되던 시기였다.

부국강병의 시대를 살던 맹자는 왕도정치가 실현되는 이상사회를 추구하며 자신의 사회사상을 펼쳐 나가게 되는데, 그의 사상은 공자의 손자인 자사의 문인에게서 공부했기 때문에 공자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맹자의 일생은 여러 면에서 공자의 생과 닮은 점이 많았는데,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으며 공자사상의 옹호와 전파에 일생의 사명으로 삼았다.

『史記』에 의하면 맹자는 각국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정치적 뜻을 펼쳐보려 했지만 제후들에게 등용되지 않았고, 만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들을 가르치고 제자 만장등과 함께 『맹자』7편을 저술하기도 했다.

시기적으로 춘추시대와 전국시대의 차이점은 봉건제도의 유지 여부에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주나라가 낙양으로 동천한 후에는 대체로 제후들이 왕권을 중시하지 않았고, 천자도 그 실권이 없어진 상태였다. 특히 춘추 초기에는 그나마 막강한 힘을 행사했던 춘추오패에 의해 주왕실의 왕권이 유지되었으나, 중기 이후가 되면 제후의 정권을 탈취하는 대부가 나타나 이들이 국가의 운명을 흔드는 권력자가 되었다.

동주의 후반기인 주 경왕40(B.C 480)년에서 진나라가 통일하기 1년 전까지의 259년 동안을 전국시대라고 하는데, 맹자가 살았던 시기는 전국시대 중기라고 할 수 있다. 전국시대가 시작되면서 성읍국가가 붕괴되고 영토국가가 출현하게 되어 춘추시대가 대부(大夫)들이 집정하던 시대였다면, 전국시대는 군주(君主)가 직접 권력을 행사하며 통일을 향해 전쟁을 계속한 군주국의 시대였으며, 앞을 다투어 부국강병을 위한 변혁정책을 시작한 시기였다.

맹자는 바로 이런 시기에 공자가 그랬듯이 천하를 돌아다니며 인정(仁政)을 바탕으로 한 왕도정치를 주장했고, 그는 공자와 유가의 이상을 옹호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했지만, 당시 현실은 오직 힘만을 요구하였기에 맹자의 주장은 위정자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런 맹자주장의 내용은 기존 질서가 무너지고 유랑자가 증가하는 사회적 현실에서 백성들이 안정되게 농사를 지을 주 있도록 하는 것이 통치자의 우선적 임무라고 생각하여, 위정자의 인정과 정전제의 시행과 윤리 도덕적으로 안정된 사회의 확립을 원하게 되었다. 이런 사회는 백성을 근본으로 하는 정치의 실현이 그의 궁극적인 목표이기도 했다.

그가 주장한 왕도론의 중요 내용은 ‘백성이 있어야 나라가 존재하며, 나라가 있으니 군주(君主)가 있다. 국가의 근본은 백성이며 국가는 그 다음이고 군주의 존재는 가볍다’고 했다. 또한 ‘하늘은 백성의 눈을 거쳐서 군주가 하는 일을 보고 있다. 백성의 귀를 통해 군주가 하는 것을 듣고 있으니 민성(民聲)이 천성(天聲)이다’라고 했다. 그러니 하늘의 뜻도 민의(民意)에 기초한다는 것이며 민의가 떠나면 군주도 그 지위를 보존할 수 없게 된다는 생각을 주장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맹자는 ‘하(夏)의 걸왕(桀王), 은(慇)의 주왕(紂王)이 천하를 잃은 것은 포학해 민심을 잃었기 때문이다 군주에 큰 과실이 있으면 충고하지만, 여러 번 되풀이하여도 들어주지 아니하면, 이 군주는 그만두게 하고 다른 사람으로 바꿔야 한다.’는 혁명론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이런 그의 사상은 제나라 선왕이 맹자에게 옛날 주(周)의 무왕이 주왕(紂王)을 토벌한데 대해 ‘신하가 군주를 방벌(放伐)해도 좋은가’라고 물었을 때에, ‘인(仁)을 해친 자를 적(賊)이라 하고 의(義)를 해친 자를 잔(殘)이라 한다. 이러한 잔적인(殘賊人)은 시정의 필부(匹夫)다. 그러한 필부는 이미 군주가 아니기 때문이다. 무왕이 한사람의 공해(公害)인간을 없앴다는 말을 들었으나 군주를 죽였다는 말은 들은 바가 없다.’ 라고 한데서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천명에 반하는 자는 천하를 잃는다는 ‘역성혁명(易姓革命)사상’을 당연함으로 생각한 맹자를 대부분의 왕이나 군주들은 껄끄러워 경계하게 되었고, 청(淸)나라 초기에 황종의(黃宗義)는 이 혁명사상을 적극 계승하여 청조를 타도하는데 불씨로 삼기도 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어머니의 적극적인 자식교육의 표상으로 잘 알려진 맹자는 ‘군주는 즐거움을 독점해서는 안 된다. 백성과 함께 즐겨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만이 군주도 즐길 수 있다. 민본사상을 강조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여기서 여러 사람과 함께 즐거워 한다는 ‘해락(偕樂)’이라는 말이 생기기도 했다.(다음호에 계속)

이희용 /
대진대학교 동양철학 박사과정, 시인, 연극연출가, 제3대 포천시예총회장, 광릉숲생태문학회장, 한국스카우트경기북부연맹 감사, 전 경기도예총부회장, 포천시수능시험장유치추진위원장, 포천신문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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