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 가면 용추사(龍湫寺) 가는 물삼거리 ‘매바우’ 마을 입구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물레방아가 있다. 이 물레방아는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선생의 호를 딴 ‘연암물레방아’라고 불린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의 고향을 ‘물레방아의 고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선생의 호는 연암(燕巖), 자는 중미(仲美)이라 하였고 1737년 영조 13년 당시 서울의 명문인 반남(潘南) 박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홍대용,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이서구 등과 함께 이용후생의 학문을 논구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41세 때에 권신 홍국영(洪國榮)에 의해 벽파(僻派)로 몰려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황해도 금천(金川)의 연암협(燕巖峽)으로 몸을 피해 지내면서 독서에 전념하다가 44세 때 사신을 따라 청나라를 여행했다 이때에 새로운 사상과 과학문명의 세계적 조류를 여러 면에서 직접 체득하게 되었다. 이런 까닭에 이 여행의 체험을 기록한 『열하일기』는 참신한 문체로서 당시 문단에 파문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선생의 실학사상이 집약적으로 담겨 있는 값진 민족문화 유산이 되었다.
50세에 비로소 벼슬길에 나서게 되어 55세에 지방 관직으로서는 처음 안의고을 현감이 되었으며, 안의(安義)를 떠난 지 9년 후인 1805년 69세로서 일생을 마쳤다. 선생은 1792년에서 1796년까지의 5년 동안 안의현감으로 재직하면서 행정가로서 훌륭한 업적을 남겨 놓았을 뿐만 아니라 평생 가슴에 품고 있던 자신의 실학을 유서 깊은 이 고장에서 집대성하였다. 대표적인 저작의 대부분도 이때에 이루어 놓은 것이다. 먼저, 선생이 저작 활동을 통해 이 고장을 빛낸 것이다. 선생이 이 고장에 있을 때 지은 저작으로 문집『연암집(燕巖集)』에 수록되어 전하는 것만도 40여 편이 된다.
이 문집에는 국계민생에 관련된 중요한 글이 다수 포함되어 있고 이곳에서의 치정치민의 과정에서 쓰인 것, 그리고 안의(安義)를 비롯한 함양, 거창, 합천 등 우리 고장의 아름다운 산수와 문물을 구체적으로 기술한 내용이 실려 있다. 또한, 선생은 이곳에서 자신의 문집을 정리하면서 편제에『인상각선본』,『공작관문고』와 같이 이곳 관아 건물의 명칭을 붙여 자신의 안의 시절을 기념했다.
이러한 저작 활동을 통하여 당시의 일류문인들이 이곳을 찾아오게 하였고 그 결과 우리 고장이 당시 우리나라의 문학의 중심지로 여겨지게 됐다. 또한, 선생이 평소에 깊이 연구하였던 과학 기술을 이 고장에 접목시킨 점은 특기할 만하다. 이용후생의 실학에 특히 힘을 기울였던 선생은 부임하자 곧 북경에서 체득한 지식으로 공방에게 직접 기술을 가르쳐 풍전직기 수전운전 즉, 배틀 양수기, 물레방아 등 새로운 창안에 의한 생산기구를 제작하여 사용하도록 했다.
선생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이조후기의 탁월한 실학파 학자이며 우리 역사상 최고의 문학가의 한 분이시다.『열하일기(熱河日記)』를 비롯하여 선생이 남긴 수많은 글은 편편이 경세제민과 이용후생의 뜻을 담고 있어 민족사의 창조적 발전에 기여한 바가 매우 컸다.
선생이 나의 고장에서 활동하신 분이라 더욱더 자긍심을 가진다. 나라가 어수선한 작금의 현실 앞에 선생 같은 분이 생존했더라면 나라와 백성을 위해 몸바쳐 봉사했으리라 의심치 않는다. 지역갈등, 계층갈등, 이념갈등으로 나라 전체가 이분법으로 서로 불신하고 등을 돌려 상생으로 한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고 적 아닌 적으로 서로 싸우고 있다.
세상에는 여러 갈래의 길이 있다. 그 가운데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은 분명히 있을 것이다. 낡은 길이든, 새로운 길이든 길은 길이다. 낡은 길은 낡은 대로, 새로운 길은 새로운 대로 쓸모가 있겠고 필요할 것이다. 물레방아는 종일 둥글게 걷고 있다. 끝이 없는 길을 묵묵히 돌리면서 세월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