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선생은 태어날 때부터 모습이 수려하고 맑았으며, 정신이 뛰어나서 사람들이 모두 보기만 하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나이 24세에 ‘단사부(丹砂賦)’를 지어서 성균관 진사에 뽑히기 전에 같이 간 사람들 사이에 소문이 자자하였다.
부모님의 상(喪)을 당하여 6년간 시묘하고, 상을 마친 다음 병오년 문과에 응시하여 대동승에 발탁되었으며, ‘열운정기’를 지어 일시에 칭찬과 상을 받았다. 삼등, 함흥, 평창, 강릉, 네 고을의 부사를 역임하였는데 떠난 다음에 모두 비(碑)를 세웠다.
내직으로 성균관 사성(司成) 종부시정(正)이 되었다가 다시 나가서 회양 철원군수가 되었는데, 그곳에 산수가 있어서 즐기기 위하여 구한 것 같다. 회양에 있을 때에 여러 해에 걸쳐 자주 작은 교자를 타고 금강산에 왕래하며 초연하게 세상을 지낼 뜻을 가지고 있었다.
만폭동들에 여덟 자를 큰 글씨로 새겼는데, 이 글자를 평가하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고운 최치원의 쌍계석문 글씨가 이에 못 미친다고 하였다. 선생은 말년인 선조 15년(1586)에 안변부사(安邊府使)가 되어 부임하는데, 안변은 북쪽에 관문 중에서 한 도회지라서 풍속이 사납고 까다로웠지만, 이곳에 부임하여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를 다하고 교화에 힘쓰기에 정성을 다하였다.
그가 죽은 뒤에도 안변사람들은 부모의 은혜보다 무거운데 최복(衰服)을 입지 못했다고 하면서 평소의 은덕을 칭송하여 거사비(去思碑)를 세우기도 하였기에, 감사(監司)가 도내(道內)에서 그가 제일이라고 왕께 상주(上奏)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어느 날 갑자기 큰 못을 파고 짐승에게 먹일 것을 쌓아놓고 말하기를, 다음에 군마(軍馬)가 주둔할 것이므로 그 예비하는 방책이라고 하였다. 다음해 1513년 계미(癸未)에 여진적난(女眞賊難)으로 대병(大兵)이 북으로 이동하는데 모든 사람들이 물자를 주선하는데 급급하였다. 심지어 처벌을 당해 죽는 자도 있었으나 홀로 태연하므로 사람들이 더욱 신인(神人)다운 모습에 탄복하였다. 이렇게 북방의 병란을 미리 예제하여 마초를 많이 비축하여 위급을 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안변부사로 재직시 지릉(智陵: 조선 태조 이성계의 증조부인 익조의 묘소)의 화재로 인하여 수령이(守令)의 책임상 법에 저촉되어 해서(海西:지금의 황해도)로 귀양 갔다가 풀릴 무렵에 병으로 돌아가니 향년 68세였다. 그해 영평현(永平縣) 금조산(金山鳥)에 모셔 장사지냈다. 그곳은 봉래 양사언이 살던 곳이었다.
벼슬길에 올라 40년 동안 명읍(名邑)을 맡았었는데 들어감에 한 푼도 넉넉함이 없었고, 나감에 말(馬) 한 마리도 변변치 못하였고, 처자를 위해서는 털끝만큼도 도모하지 않았다. 항상 말하기를 나는 사지공(四知公)의 후손으로 선조에게 욕되게 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고 하니 가히 청백리 관직생활을 했다.
또한 격암(南格) 남사고(南師古)에게 수학하였는데, 임진란(壬辰亂)과 그 뒤 선조 40년을 미리 점쳐서 추산한 것과 같다. 풍악(楓嶽) 동쪽 다섯 군데 아름다운 곳에 작은 정자를 지어 놓고 시를 지었으며, 행장과 스스로 먹는 것에 꾸밈새가 없이 수수하고 천연스러웠으며, 간간이 기이하고 호걸스러운 말을 해서 사람을 놀라게 하였다.
그의 글씨에 대해서는 해서(海書)나 초서(草書)의 필법을 온전히 터득하여 당나라 때 이백(李白)과 교유하던 도사(道士) 육수정(陸修靜)과 유학자인 도연명(陶淵明)과 가까웠던 노공(魯公) 장진(藏眞)의 경지에 이르렀고, 큰 글씨로 비(飛)자를 써서 족자를 만들었는데 하루는 이상한 바람이 홀연히 일어나 바다 속으로 날아가 잠겨 버렸는데, 바로 그 날이 봉래 양사언이 작고한 날이었다고 태학사(太學士) 유서경(柳西絅)이 기록했다.
아, 사람이 한 가지 착한 일과 한 가지 기예(技藝)만 있어도 능히 당시에 대우받을 터요 작위가 찬란한데, 선생 같은 분을 어찌 훌륭하지 않다고 할 것이며, 어찌 기예를 안 익혔다 하겠는가. 그런데 지위가 이 정도에만 이르고 도(道)가 이에 그치고 말았을까. 그러나 벼슬과 부귀가 어찌 선생의 마음에 자리 잡았겠소. 비록 선생을 배척하더라도 저울 치수만한 것이라도 세상 사람들의 좋아하는 바와 바꾼다고 한다면, 진실로 선생에게는 족히 말할 것이 못된다.
그리고 자손들에 관한 기록이 새겨져 있으며, 마지막으로 용주 조경은 봉래에 대한 생평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원정(元精)이 배태되어 독실한 異人(이인)을 낳았도다. 내외의 방술에 온갖 정신을 쏟았고, 처음에는 이단(異端)을 가까이 하더니 종당엔 선도(仙道)에 빠졌도다. 이단과 선도를 하지 않았으면 넉넉히 요천(寥天)에 드실텐데, 공께서 남긴 주옥같은 시편이 세상 사람들이 두루 읽어 즐기도다. 내가 선생을 명하지만, 이것은 보잘 것 없는 글에 불과하도다.”
이렇게 봉래 양사언은 이인(異人)으로 태어나 속세와 방외를 가리지 않고, 자연현상에 성질을 이끌어내고 그에 의해 길흉을 점치고 불로장생을 추구하는 방술에 몰입하였고, 유자(儒者)이면서 불자(佛者)였으며, 만년에는 선도(仙道)에 몰입했던 신선(神仙)같은 인물로, 40여년의 관직에서 선정을 베풀어 온 백성의 존경을 받았던 포천의 자랑스런 도사(道士)였다.
이희용 대진대학교 동양철학 박사과정, 시인, 연극연출가, 제3대 포천시예총회장, 광릉숲생태문학회장, 한국스카우트경기북부연맹 감사, 전 경기도예총부회장, 포천시수능시험장유치추진위원장, 포천신문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