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래 양사언 선생의 행적을 살필 수 있는 현존 유일한 자료는 선생의 묘지 앞에 새겨 놓은 묘갈명이다. 그런데 이 묘갈명은 봉래선생의 아들인 종정공(宗正公) 감호 양만고(楊萬古)가 부친의 시를 찍어 세상에 펴내고, 비석을 갖추어 선생의 행장으로 명(銘)을 새기고자 그의 고향사람 고공원외랑(考功員外郞) 조경(趙絅)에게 청하여 새겨졌다고 한다.
이렇게 신선에 비교되는 봉래 선생의 묘갈을 지었던 용주 조경 선생은 포천시 신북면 가채리 출신으로 관직에 나아가 높은 학덕과 강직한 성품으로 실행한 온전함을 높여서 사후에는 관직의 최고의 귀감인 청백리에 녹선 되기도 했다.
또한 임금에게 직언을 망설이지 않았으며, 통신사 부사로서 일본에 다녀와 저술한 『동사록(東槎錄)』에는 당시 일본의 사정이 소상히 기록하였으며, 호란(胡亂) 이후에 피폐한 민심을 수습하였고, 효종과 현종이 여러 차례 월봉과 물자를 하사하였으나 이유 없이 녹봉을 받는 것은 불가하다 하여 사양 하였다.
공사에 임해서는 좌천, 강등, 하옥되면서까지 임금이 싫어해도 바르게 직언하여, 40여년의 벼슬길에서 조정에 선 것은 겨우 8년여에 불과하고, 포천 최초의 사찬(私撰) 군읍지인 견성지(堅城誌) 편찬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포천의 용연서원에 배향 된 포천을 대표하는 명현이고, 봉래 선생의 장자인 감호 양만고(楊萬古)보다는 12년 연하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강직한 선비인 용주 조경선생이 같은 고향 포천의 어른인 봉래 양사언 선생 사후에, 평소 친절하게 지내던 봉래의 아들 양만고의 부탁으로 지은 양사언의 행적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새겨져 있으니, 이번 호부터 그 자취를 따라가 보도록 하겠다.
“선생(봉래 양사언)은 丁丑年(정축년:1517)에 태어나 甲申年(갑신년:1584)에 돌아가셨으니 지금으로부터 50년이 되었다. 우리의 고향에서는 부녀자나 농부가 선생이 사시던 마을을 지날 때는 반드시 선생의 마을이라 말하고, 선생의 묘을 지날 때는 선생의 묘라 이르니, 어찌 가르쳐서 이르겠는가. 우리 고을이 아니더라도 사방(四方)의 사람들이 선생의 성명을 모르는 자 있으랴. 비유하건데 상스러운 기린과 아름다운 봉황(鳳)이 비록 수천 년 빛을 감쳤을지라도 구포(九苞)의 털과 귀창(歸昌)의 소리만 들어도 사람들이 다 사모할 줄 알아, 어디선가 직접 보고 들은 듯이 여기거늘, 선생의 명성을 전하는 것을 과연 片石(편석)에 새김이 있어야 한단 말인가? 하니, 종정공이 말하기를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선생의 효우(孝友)와 행동과 치적, 경력과 벼슬의 시종(始終)을 내세(來世)에 밝히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그러니까 용주 조경 선생이 ‘우리의 고향 포천에서는 누구나가 봉래 양사언 선생이 살던 마을을 양사언의 마을 이라 했고, 그분의 묘를 지날 때는 봉래의 묘라고 하였으니 사방에 그 분의 성명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 최고의 덕을 상징했던 기린의 다듬어지고 예의바른 자태와 봉황같이 법도에 맞는 우아한 자태는 어디에 숨겨져 있더라도, 털끝만한 모습과 작은 소리만 들어도 사랑하고 존중할 줄 알 터인데, 꼭 그분의 공적을 비석에 새겨야만 알 수 있단 말입니까?’ 하고 물으니, 봉래의 아드님인 종정공 만고께서는 그렇더라도 그분의 행적을 내세에 밝히지 않을 수 없다고 했던 것이다.
“선생의 諱(휘)는 士彦(사언)이요, 자는 應聘(응빙)이며, 호는 蓬萊(봉래), 또는 海客(해객)이다. 그 선조는 본래 漢(한)나라 太尉(태위) 楊震(양진)의 후예이며, 7세조이신 起(기)가 元(원)나라 順帝(순제) 때 政丞(정승)으로서 魯國大長公主(노국대장공주)를 따라 高麗(고려)에 왔으므로 恭愍王(공민왕)이 上黨伯(상당백)을 봉하였다. 그리하여 淸州楊氏(청주양씨)가 되었다. 휘 天震(천진)은 조선조에 들어와서 개국의 공을 세워 工曹典書(공조전서)가 되었는데 선생의 高祖(고조)이다. 이 분이 휘 治(치)를 낳으셨으니 황해절도사가 되었으며, 휘 悌達(제달)을 낳으셨으니 宣敎郞(선교랑)이며, 선교랑이 휘 希洙(희수)를 낳으셨으니 敦寧主簿(돈녕주부)인데 僉使(첨사) 文化(문화) 柳湋(유위)의 딸에게 장가를 들어 선생 및 士俊(사준) 士奇(사기)를 낳았다. 모두 문장과 경술이 뛰어나 세상에서 三傑(삼걸)이라 하여 중국의 眉山蘇氏(미산소씨)에 견주었다.”
여기서 망하는 휘(諱)는 죽은 사람의 생전(生前)의 이름을 공경해 이르는 말로, 선생의 휘는 사언이며, 호는 봉래, 또는 해객이다. 그 선조는 본래 중국 한나라 태위 벼슬을 하던 양진의 후예이며, 7대조이신 양기가 원나라 순제 때 정승으로 원나라 황족 위왕(魏王)의 딸로 공민왕과 결혼하여 왕비가 되었던 노국대장공주를 따라 고려에 왔으므로, 공민왕이 지금의 청주지방을 다스리는 상당백(上黨伯)에 봉하였다.
그리하여 청주양씨가 되었고, 선생의 고조인 휘 천진은 조선조에 와서 개국공신이 되어 고려 후기와 조선 초기의 정3품에 해당하고 지금의 장관급인 공조전서가 되었다. 증조인 휘 치(治)는 황해절도사가 되었으며, 조부인 휘 제달은 선교량이며, 선생의 부친인 휘 희수는 종6품직인 돈녕주부인데, 종4품 첨사 문화유씨 유위의 딸에게 장가를 들어 선생과 사준, 사기를 낳았다. 모두 문장과 경술에 뛰어나, 세상에서 삼걸이라 하여 중국 당송 팔대가에 일가인 북송 때 대학자인 소순과 아들인 소동파, 소철을 일컫는 미산소씨와 견주었다고 한다. (다음호에 계속)
이희용 / 대진대학교 동양철학 박사과정, 시인, 연극연출가, 제3대 포천시예총회장, 광릉숲생태문학회장, 한국스카우트경기북부연맹 감사, 전 경기도예총부회장, 포천시수능시험장유치추진위원장, 포천신문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