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방송에서 심야 토론(討論)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런가 하면 직장에선 토의(討議)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영어로는 토론을 디베이트(debate)라 하고 토의를 디스카션(discussion)이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 주변엔 토의와 토론을 혼동(混同)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토론이란 서로 다른 주장(主張)을 하는 것이고 토의란 합일점(合一點)을 찾아가는 것이다. 토론의 목적은 자신과 다른 주장을 가진 상대를 논리(論理)와 언변(言辯)으로 제압하는 것이다. 토의는 그게 아니다. 토의는 의견(意見) 차이를 좁혀 합일점을 찾는 것이다. 토의와 토론이 근본적(根本的)으로 다른 점이다.
토론은 내가 옳다는 신념(信念)에서 출발한다. 토의는 내가 틀릴 수 있다는 가정(假定)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토의에는 결론(結論)이 있지만 토론에는 결론이 없다. 지켜보는 청중(聽衆)이 우열과 승패를 판정(判定)할 뿐이다. 제3자의 입장에서 듣는 사람들이 판정하고 수궁할 뿐이다. 토의는 내가 틀릴 수 있다는 생각에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 있다. 토론은 내 주장이 절대적(絶對的)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토론은 논리(論理)로 승부한다. 논리로 승부하는 관계로 머리싸움이 치열(熾熱)하다. 토론은 머리싸움이고 말싸움이고 기(氣)싸움이다. 머리싸움이라고 하는 것은 지식체계(知識體系)와 그 수준(水準)을 말하는 것이고 말싸움이라고 하는 것은 언변(言辯)과 화술(話術)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싸움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를 압도(壓倒)하는 자신감을 말하는 것이다. 상대를 제압(制壓)하는 눈초리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방송에서 토론하는 걸 보면 그 사람의 지적 수준과 성격까지 다 들여다 볼 수 있다. 그 사람의 지식과 화술과 자신감이 다 들어나기 때문이다.
물론 신념이 필요하다. 신념에 따라 가는 길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신념에 따라 행(幸) 불행(不幸)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이 개인을 뛰어넘어 나라의 향방(向方)을 결정한다고 생각해 보라. 아찔하지 않은가? 신념이 도를 넘으면 집단적 광기(狂氣)로 둔갑(遁甲)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6.25를 통해 그 같은 현실을 많이 목격(目擊)했다. 그래서 때로는 신념도 되돌아보아야 한다. 신념도 틀릴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믿는 이념(理念)이 틀릴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를 되돌아보라. 어떠했는가? 그 이념과 신념이 절대적(絶對的)이었는가? 아니다. 이 엄연한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신념은 필요하지만 그 노예(奴隸)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 돼야 한다. 성찰(省察)하고 반성해야 한다. 성찰과 반성을 허락하지 않는 신념은 아집(我執)일 뿐이다. 역사에서 보는 커다란 비극(悲劇)은 대개 신념이 부족한 데서 온 게 아니라 잘못된 신념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직시(直視)해야 한다.
토론의 첫 계명은 상대의 말을 경청(傾聽)하는 것이다. 귀를 열어놓고 들어야 한다. 처음부터 귀를 닫아놓고 시작하면 상대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 상대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 그리고 논리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감정이 앞서면 안 된다. 감정이 앞서는 순간 논리는 증발되고 격한 말싸움이 되고 만다. 논리적으로 받아들이고 논리적으로 따져야 상대가 꼼짝 못한다. 서로를 존중하고 예의를 지키면서 수준 높은 논리를 펼쳐나가야 청중으로부터 박수 받는다. 말싸움이 아니라 논리가 불꽃을 튀기는 멋진 토론을 보여줘야 한다. 얼굴 두껍고 목소리 큰 사람이 좌지우지하는 토론은 청중을 짜증나게 할 뿐이다.
토론자들이 새겨들어야 할 일이다. 토론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합일점을 찾아가는 토의도 생각해야 한다.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의 말에도 귀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합일점(合一點)을 찾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