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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출 에세이=52] 가을 타다


김형출 기자 / mjmc00@hanmail.net입력 : 2012년 10월 19일
 
↑↑ 김형출 / 시인, 수필가
ⓒ (주)포천신문사 
태풍과 우기가 유난히 많았던 여름이 지나가고 어느새 소슬바람이 옷깃 여미는 가을이 찾아왔다. 선선하다 싶더니 금세 조석으로 쌀쌀하다. 시월은 완연한 가을이다. 탁 트인 파란 바다, 솜털 사이로 낮달이 수줍다. “거기, 파란 바다에 퐁당~ 빠져 영원히 기절하고 싶어라!”

들판은 황금빛이요, 풍요로움이다. 산과 들은 다투어 불타고 있다. 가을 하면 천고마비의 계절이요, 독서의 계절이요, 사색의 계절이다. 또한, 추남 추녀(秋男秋女)의 계절이다. 시월은 계절 중의 상달이기도 하다. 그래서 시월은 ‘계절의 황제’라 했던가, 추남 추녀를 위한 대관식이라도 거행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낙엽이 나뒹구는 쓸쓸함에 가을 남자는 베이지색을 사랑하며 빈 노트에 가을을 베끼고 있다. 하필이면 가을 더러 남자의 계절이라 했던가, 그럼 가을을 태우는 가을 여자는 없단 말인가? 여자와 남자가 포개져 있는 그 상상력이 가을 타는 냄새인 줄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빗나간 여름의 질투였다. 가을 전령들이 다투어 끌어주고 밀어주고 달력 한 장 뜯어낼 때면 가을은 약발 받은 단풍처럼 붉게 타는 것이다. 바로 ‘가을 오르가슴’ 말이다.

가을은 인간의 정서를 유혹하고 자극하는 호기심만이 아니다. 또한, 우주의 색채미학 때문만이 아니다. 가을은 낙엽처럼 쓸쓸하고 고독해야 운치가 있다. 가을은 죽음과 주검조차도 아름답게 노래해야만 한다. 가을은 비움과 나눔 그리고 반성과 성찰하는 실천적 사랑의 적기이기 때문이다. 유선처럼 흘러가는 저 솜털구름은 도봉산 허리에 감긴 빛깔 좋은 S 몸매처럼 나근거리다. 시(詩) 한 톨, 수필 한 닢, 소설 한 수 책갈피에 끼우고 고즈넉한 오솔길을 걸어 보면 인생이 보인다. 완행열차에 몸을 던지고 정처 없이 떠나는 홀가분한 일탈은 인생이 슬퍼 눈물 날 것만 같다. 밤 토닥이는 소리에 귀 쫑긋 여미는 다람쥐처럼 가을은 자연의 은혜를 베풀고 있다. 자연의 위대한 순리를 알려준다. 때가 되면 떠난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고 있는 자연의 위대함은 숙연하다.

산타는 냄새가 상큼하다. 뿌옇게 흐린 잿빛 하늘에서 가랑비가 내리기도 한다. 일요일 오후, 아내와 함께 간편한 복장으로 들길 따라 걸었다. 푸르디푸른 초목은 어느새 누르스름하다. 이름 모를 들풀 사이로 살사리꽃 한 송이 얼굴을 뾰족 내밀고 있다. 2시간여 동안 천천히 걷은 사이에 바람에 말을 붙여보고 나무에 손짓해보고 들풀에 이름을 묻는다. 그러면서 찰칵! 찰칵! 그 이름과 얼굴을 카메라에 담았다. 가을은 소리소문없이 왔다가 소리소문없이 떠나갈 것이다. 가랑비가 머리카락에 사뿐히 앉으면 내 마음은 한 마리 나비가 된다. 산들바람이 두 뺨을 살포시 어루만지면 가을은 모과 향기처럼 촉촉하다.

이런 이미지를 요즈음 유행어처럼 죽인다! ‘쥑인다’라고 표현해야 하나, 상대방에게 가장 정확하고 세밀하게 전달하는 수단이 글이라는데 글로는 표현할 방법이 없어 답답할 노릇이다. 내가 갈구하는 그 감정은 물 흐르듯 굽이치는 순백한 언어감정이다. 파괴적인 상상력과 기발한 언어유희의 소유자인 L 소설가의 번득이는 문장 하나를 떠올리면 황홀해서 까무러칠 것만 같다. 다른 한편으로는 질투가 난다. “하느님, 지금 저하고 장난치시는 겁니까?” 다 알고 보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누구나 발견할 수 없는 신선한 언어이다. 그 작가가 부러워 죽겠다.

한참을 걷다 보니 생각의 몰골이 지끈거린다. 저만치에 바람난 살사리꽃과 키스하는 엉큼한 잿빛 공간이 부럽다. 시월이여! 가을 남자를 미치게 하라 마라! 치매를 앓고 있는 초췌한 가을 남자는 둥글게 기우는 계절 끄트머리에서 수평으로 떨어지는 나잇살을 훔쳐보고 있다. 깜박깜박 커가는 청춘을 질투하며 물구나무 아래 일렁이는 단풍잎 색조는 여인의 붉은 오르가슴처럼 황홀하다. 치매가 기절하면 금이 간 바람 소리에 나는 그냥 머문다. 지금, 치매를 앓은 초췌한 가을 남자는 가을 정취에 반해 단단히 바람이 나 있다.

함께 걷던 아내는 갑자기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 걸음을 멈칫 멈추고선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킨다. “저기 보세요? 꽃이 참 예뻐요.” 고개를 옆으로 살짝 돌리니 그 무엇이 보인다. 저만치에 노란 국화꽃이 청순하게 피어 있는 것이다. “와! 정말 아름답다!” 우리는 국화꽃이 피어 있는 곳으로 다가가 국화꽃에 코끝을 갔다 댔다. 은은한 꽃향기가 콧속으로 상큼하게 유입된다. 이런 자연스러운 가치를 어느 누가 감히 흉내를 낼 수 있단 말인가, 위대한 예술가의 창조물 중에는 수천 년 동안 사랑을 한몸에 받은 예술품도 있지만, 자연의 순수함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고대 그리스의 의학자이자 철학자인 히포크라테스의 명언인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동서고금을 통한 진리로 인식되고 있다. 이 말은 우주의 자연스러운 현상을 말하는 것이라 믿고 싶다. 가을은 생각나는 것들이 많아 쓸쓸해서 좋다.

김형출 / 시인, 수필가
김형출 기자 / mjmc00@hanmail.net입력 : 2012년 10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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