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하 선생은 박정희 정권하에서 대표적인 재야인사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유신헌법을 만들고 영구집권을 획책하던 시절에 용감하게 헌법 개정을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에 앞서다가 포천 약사봉에서 산행을 하던 중 실족사라는 의문사를 당하였다. 정확한 사인이 밝히지 않은 상태에서 묻혀있던 사건이 최근 가족들이 이장하는 과정에서 그의 두개골의 특정 부위만 함몰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절벽에서 실족하여 굴러 떨어졌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잃고 말았다.
그렇다면 장준하가 실족사보다는 타살되었을 주장이 가능한 것인가. 장준하 선생은 모든 면에서 박정희와 대척점에 섰던 인물이다. 박정희가 일본 육사를 거쳐 일본군 장교가 되었던 반면에 장준하는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영하여 광복군 대위가 되었다. 박정희가 군사 쿠테타를 일으켜 민주정권을 무너뜨렸다면 장준하는 군사 독재에 항거하고 그의 친일행각을 끝까지 파헤치려는 사상가였다.
장준하는 삼성 사카린 밀수사건의 배후가 박정희라고 주장하다 ‘국가 원수 모독죄’로 구속되었지만 그의 투쟁을 멈추게 할 수 없었다. 박 정권은 긴급 조치를 발효시킨 후 그에게 15년형을 구형하여 그의 비판의 입을 막으려고 국가적 폭력을 주저하지 않았다. 푸코는 국가권력은 통치를 위해서 시민들의 몸에 영향을 끼친다고 보았다. 권력이 각인되는 곳이 바로 몸이고 사법과 권력이 교차하는 접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신체제라는 독재정권을 공고하게 하고 영구화하려고 획책하던 국가권력이 저항의 상징이었던 장준하선생의 몸을 어떻게 하려고 하였을까. 영원히 구속하려고 하였지만 야당과 재야의 비판과 인권에 대한 감시내지 견제를 하던 미국의 입김으로 그의 몸을 더 이상 묶어놓을 수는 없었다. 그는 법정스님이나 김대중 전 대통령과 긴밀한 협조를 이루러 유신을 반대하는 모종의 성명을 내기 위해서 동분서주하였다는 증언들이 나온 바 있다.
사실 권력이 있는 곳이면 저항이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정권에 대한 반대나 저항을 권력의 모순을 개선하는 생산적인 방향으로 활용한다. 하지만 박 정권의 국가적 폭력은 저항에 대해서 신경질적 반응으로 일관하였고, 이는 수많은 민주인사들의 감금과 구속으로 해결하려고 했던 것이다.
국가적 폭력의 횡포에 대해서 시민들은 대개 두 가지 형태로 반응한다. 하나는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순응하고 침묵을 지키는 것이다. 심지어 그 폭력을 미화하고 정당화시켜주는데 앞서기도 한다. 일종의 숙명론으로 친일하던 자들이나 박정희 권력에 협력하여 부귀영화를 누렸던 자들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심지어 피땀으로 민주화를 획득하고도 박정희의 산업화에 대해서 과도한 지지를 아끼지 않는다. 아마도 그런 행위는 독재에 추종하거나 침묵하였던 자신의 비겁함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위선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 반응은 대조적으로 목숨을 걸고 저항하고 개혁을 하려고 투쟁하는 모습을 보인다. 장준하선생은 박정희의 친일행각과 유신체제에 대해 정론적 비판의 글과 양심의 소리를 내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푸코의 주장대로 권력은 그들의 현상유지를 위해서 강한 힘을 이용해서 약자인 그에게 영향을 미치려고 했던 것이고 그 연장선에서 그가 의문사로 그의 저항을 멈추게 하였던 것이다. 확실한 증거가 없는 한 묻혀진 과거를 왜 다시 끄집어내어 시끄럽게 하려는 것인가라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한국 사회가 더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장준하선생의 의문사에 대해서 명확한 규명과 입장을 밝혀야 한다. 더더욱 두개골 함몰이란 새로운 사실이 나온 이상 국가의 폭력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그것을 증명하려는 노력을 해야 하며, 만일 개입되었다면 국가가 나서서 사과하고 책임을 져야할 것이다. 한국이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으며, 런던 올림픽에서 5위를 차지한 스포츠 강국이라면 정치에서도 이에 걸맞은 해결의 과정을 보여주어야 비로소 이름값을 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대선을 앞두고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는 비판을 하는 자들이 있지만 그 당시 그 권력과 밀접했던 박근혜 후보가 그 진실을 밝히려는 자세를 보여주어야 국민으로부터 그녀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