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어떤 일이라도 모두 돈으로 해결하려는 현실에서, 진정으로 인간의 도리와 참된 삶을 찾고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도리가 과연 무엇인지를 옛 성현의 업적을 되돌아 스스로를 돌이켜 보는 것이야말로, 더 늦기 전에 꼭 해야 할 임무인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특히 인륜적 도덕이 땅에 떨어진 물질만능의 시대에 사람의 존귀함마저 상실해가며 기계에 의존한 각박함으로, 타인을 배려하지 못하는 인간성상실을 보면서, 우리시대에 상실해가는 배려의 마음을 찾아보고자, 다시 한 번 공자의 생애와 사상을 떠올리면서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공자(孔子)는 기원전 551년 9월 28일 노나라 곡부(曲阜)에서 조금 떨어진 창평향(昌平鄕) 추읍(郰邑)에서 부친 숙량흘이 노년에 모친 안징재(顔徵在)를 맞아 공자를 낳았으나, 그의 부모는 정식으로 혼인한 관계가 아닌 야합(野合)해서 낳았다는 해석을 놓고 여러 가지로 의견이 나뉘기도 한다.
그리고 기록에서는 공자의 조상이 주나라 이전 왕조인 은나라에서 봉토를 하사 받은 작은 나라였던 송나라의 왕에 해당하는 공족이었으며, 공자의 누대 조상 때에 노나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고 그의 부친은 시골 무사였다고 한다. 여기서 은나라는 동이족이 세운나라로 정의하고서 공자와 동이족과의 관계에 대한 연관성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아버지의 유언을 지키려 궁형을 받고도 끝내 완성한 동양 최고의 역사서 사마천의 『사기』에 있는「공자세가」에는, 공자를 제후의 기록과 함께 특별하게 예우해서 기록하였고, 공자의 자(字)가 중니(仲尼)가 된 것은 집안에서 둘째 아들이라는 뜻이었으며, 공자의 키는 9척 6촌에 달하여 ‘장인’ 요즘 말로 ‘꺽다리’라고도 불렸다고도 한다.
또한 기원전 549년 공자의 나이 3세 때 부친이 별세하자 부친의 재산이 이복누이들과 조카들에게는 상속되었지만 그의 몫은 없었고, 설상가상으로 모친마저 눈이 멀어 생활 형편은 더욱 나빠졌다고 한다.
이처럼 집안은 몹시 가난했지만 공자는 오히려 마을에 어느 늙은 선생을 모시고 열심히 공부를 하는데, 그는 어릴 적부터 제사 지내는 흉내를 내며 놀기를 좋아했을 뿐만 아니라, 옛날부터 내려오는 전통적 종교와 의례·제도·관습 등에도 매우 밝았다고 한다.
또한 그는 나이 17세 때에 말단으로 나랏일을 보게 되면서, 노나라의 대학에서 『시경』과 『서경』 등을 배웠고, 또 여러 가지 의식을 거행하는 관리에게서 예법도 배웠으며, 음악도 배우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공자는 『시경』과 『서경』을 읽고 난 후 그 책을 펴낸 주나라 문왕(文王)의 아들이며 무왕(武王)의 아우인 주공 단(旦)을 흠모하여, 일생을 그의 행적과 사상을 마음으로 본받아서 종신토록 사숙(私淑)하였다고 전한다.
세월이 흘러 공자는 나이 30에 관리가 되어 학문적으로도 많은 진전을 보였는데, 공자의 정치관은 법보다 덕으로써 백성과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었고, 세상사를 처리함에 있어 사람을 가장 중시하는 인본주의를 주창하면서, 주공이 나라를 다스리던 시대처럼 올바르고 평화로운 인간 세상을 만들어 가려는 이상을 지니고 있었다.
한편 공자는 제나라의 왕 경공(景公)과 신하들에게 진리를 가르치면서, 그 곳에서 음악을 논하고 경공에게 정명주의(正名主義)에 입각한 정치이상을 말하기도 했다. 이러한 공자의 박학다식과 고매한 인품에 매료돼 그를 흠모하게 된 경공은, 공자를 자신의 정치적 고문으로 기용하려 했으나, 그의 학식과 덕망 때문에 자신의 지위마저 위협받던 제나라 재상 안영(晏嬰)의 반대로 이마저 좌절되고 말았다.
그 후 공자는 나이 46세 무렵이 되어서야 노나라 왕의 측근인 양호(楊虎)가 세력을 잃고 물러나게 되자, 그때가 되어서야 지금의 시장격인 중도재(中道宰)가 되었고, 52세 무렵에는 형조판서격인 대사구(大司寇)의 지위에 오르게 된다.
이때 공자가 노나라의 대사구(大司寇)를 맡아 석 달이 되자, 치안이 얼마나 잘 확립이 되었던지 “길에 버려진 물건을 줍는 사람이 없어졌고 으슥한 산골에서도 산적들의 자취가 사라졌다(道不拾遺山無盜賊)”라고 『사기(史記)』에 적혀 있다.
또한 당시 공자는 순장될 위기에 처한 아이를 구하고 이 사건을 계기로 그 때까지 이어져 오던 순장의 악습을 왕에게 간하여 끝내 폐하였다. 또 제나라 경공과의 회동에서 뛰어난 지략과 용기로 전쟁 한 번 치르지 않고 단지 협상만으로 노나라가 잃었던 옛 땅을 되찾는가 하면, 당시 권세가였던 삼환씨의 횡포를 막기 위해 그들의 요새인 삼성(三城)을 허무는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계손사의 저항으로 도중에 중단되었고, 공자는 국정을 쇄신하기 위해 방자하게 권세를 휘두르는 계손사를 타도하려고 여러 모로 계책을 꾸몄으나 성사 단계에서 실패하고 말았다.
이 때문에 계손사의 미움을 받게 된 공자는, 기원전 496년에 노나라를 떠나 수십 명의 수행 제자들과 함께, 자신의 학문적 이상을 현실 정치에서 실현시켜 줄 어질고 현명한 군주를 찾아 무려 10여년이 넘게 주유열국(周遊列國)을 떠돌게 되고, 이 기간 동안 생명에 위협이 가해지는 어려움에 빠지기도 했으며, 여행 도중에 만난 은자(隱者)들에게 수모와 조롱을 당하는 참기 힘든 고달픈 세월을 보내기도 했다.
또한 당시의 왕들은 더디더라도 올바른 길을 요구하던 공자의 도덕정치보다는, 손쉽게 국력을 팽창시켜 천하를 손에 넣으려는 부국강병만을 원하고 있었기에 공자는 제후들에게 철저히 외면당하게 된다.
마침내 공자는 자신의 학문적 이상이 당시의 정치 상황에서는 결코 실현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되고 그 이후로는 제후나 군주를 설득하려던 것을 단념하고,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가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이며 중국의 오래된 전통적 경전들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게 되는데, 배우려고 찾아오는 제자가 삼천 명에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로 노나라에 전해 내려오던 역사서를 다시금 새로 엮어 『춘추』를 편찬했다고 한다.
그러나 만년에는 아들 백어가 50세에 죽게 되고, 특히 아끼던 제자 안연과 자로마저 잇따라 세상을 떠나게 되자, 공자는 "하늘이 나를 버렸다"며 비통함을 감추지 않았다. 이렇게 아들이 일찍 사망하자 공자는 어린 손자를 키우게 되는데, 그의 손자인 자사는 훗날 공자의 뛰어난 제자 중에 한 사람인 증자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워 할아버지인 공자의 사상과 학맥을 이어가게 된다. (다음호에 계속)
이 희 용 / 대진대학교 동양철학 박사과정, 시인, 연극연출가, 제3대 포천시예총회장, 광릉숲생태문학회장, 한국스카우트경기북부연맹 감사, 전 경기도예총부회장, 포천시수능시험장유치추진위원장, 포천신문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