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우리사회에 있어 근대를 규정짓는 요소의 준거조차 모호하기 때문에 그 기준에 여러 가지 혼동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급속하게 이루어진 서구화를 근대 또는 현대의 개념으로 받아들인다면 조선후기의 역사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러한 조선후기에 서구의 신문물을 가져다준 물질문명보다도 우리에게 진실로 중요했던 것은 우리가 스스로 근대화를 추구했던 자생적인 노력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추구했던 근대화의 노력에는 기존에 지키고 고수해왔던 성리학적 이념과 가치 안에서도 충분히 근대의 노력이 있었다.
이른바 구한말이라는 시대적 특수성 속에서 강화도 조약 이후의 구체적 활동으로서의 ‘민족주의’라는 그 이념적 바탕 속에는 성리학의 영향이 매우 컸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민족사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자신의 정체성을 보존하는 문제와 서구문물을 수용하는 것에 따른 변화는 받아들이는 방식에 따라서 전혀 달라질 수 있다.
특히 우리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외부의 문물을 수용하고자 했던 대표적인 사상으로 화서학파의 정신을 들 수 있는데, 그 특징은 성리학적 방법으로 민족자존의 문제에 적극적이었으며, 화서의 이분법적 가치관을 민족현실에 적용하려고 했었다.
특히 우리가 잊고 살아가지만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에서 3인이 포천 출신이었던 것은, 조선 말기에 우리민족의 자주성을 대표했던 선비들 중에서, 화서학파를 지키고 가꾸어 나간 중암 김평묵, 면암 최익현, 용서 유기일 선생으로 이어지는 포천출신의 화서학파 선비들에게는 우리민족을 사랑하는 강한 민족정기를 그 바탕에 두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양평출신인 화서 이항로가 화서학파의 창시자라면, 포천출신인 중암 김평묵은 화서학파의 중흥을 이룩한 인물로 평가받아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화서가 확립한 심주리설을 근거로 하여 당시 조선정부의 척사정책에 이론적 바탕이었으며 화서학파의 급속한 성장에 위기감을 느낀 매산학파는 화서학파의 심설(心說)과 출처관을 문제 삼으면서 논쟁을 유발시켰다.
사실 화서의 심주리설은 실제로 성리학적 관점에서 볼 때는 비판받을 소지가 내재해 있기도 했고, 그렇기에 화서의 고제자(高弟子)들 사이에서도 그에 대한 대응방식이 여러 갈래로 나뉘었는데, 실질적으로 매산학파의 마지막 적자라고 하는 전우는 화서의 심주리설(心主理說)을 양명학으로 규정하고, 화서가 우암을 자파의 학문연원으로 주장한 것은 외부의 비판을 막기 위한 방편이었다고 강한 독설을 퍼붓기도 했다.
이런 전우의 비판은 나름대로 예리한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화서학파의 존립에 큰 위기를 불러왔으므로, 화서와 중암 김평묵의 제자인 ‘성재 유중교’는 전우의 비판에 동조하면서 스승인 화서의 이론을 수정해야 한다고 하며 이른바 ‘선사심설조보논쟁(先師心說調補論爭)’을 일으켜서 학파내부의 갈등을 고조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엇갈린 주장에도 매사를 신중하게 대처하면서 스승 화서의 심주리설을 끝까지 옹호하면서 학파의 결속을 도모한 사람이 바로 중암 김평묵이었는데, 면암의 주장처럼 우암의 심설을 직접 비판할 경우, 노론이 세도를 부리던 어려운 상황 속에서 화서학파는 그 존립마저도 크게 위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해 주는 대목이다.
그래서 스승인 화서사후에 화서학파 전체를 지휘했던 중암 김평묵은 스승의 학설이 우암 송시열 심설의 본뜻을 계승한 것이므로, 화서학파는 노론의 도통을 계승하였음을 적극적으로 내세우면서, 스승의 심성에 대한 비판을 하는 사람들에게 명확하게 해명을 하고 내부적인 결속을 다졌으며, 위정척사운동에 적극적으로 앞장서서 신흥 산림세력으로 정국을 주도하면서 위기를 극복하고 학파를 발전시켰다.
또한 화서학파를 공식적으로 반대했던 남인세력들 마저도 척사운동에 참여시키는 수완을 발휘하면서 세력을 확장해 나갔으며, 스승인 화서의 심설에 의문을 제기하며 논쟁을 일으켰던 제자인 유중교에게서는 중암이 죽는 날까지 진솔한 사과를 받아내지 못했다.
그러나 중암이 작고한지 2년 지난 후에 성재 유중교의 조카이자 애제자인 유인석이 ‘정안’을 환수하여 다시금 사람들의 안목을 가리지 말라는 성재 유중교의 반성에 글을 중암 김평묵의 영전에 바침으로써 갈라졌던 계파를 다시 화합한 것도 중암이다.
이렇게 중암 김평묵은 화서학파의 성장을 위해 온 힘을 다하여 애를 썼으며, 그의 이런 노력에 대해서 면암 최익현이 썼다는 제문에는 “선사(화서)에게 무례함을 보면 새매가 새를 쫓듯이 하였다. 처음에는 귀양 가는 화를 입었고, 제자의 배반을 당하는 액운이 있었고, 스승의 이론을 해명하고 척사위정을 지휘하다가 유배를 갔던 일과, 스승의 심설로 인해 제자 유중교에게 받은 심적 고통을 표현한 것”으로 보아, 중암 김평묵이 화서학파의 수문장으로 얼마나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었는지를 확인해 주고 있다.
이런 화서학파의 정신은 후대로 이어져 스스로 화서학파임을 주장했던 안중근을 비롯한 독립 운동가에게 이어졌고, 민족의 지도자로 불리는 백범 김구가 독립운동 후 귀국하자마자 면암 최익현 선생의 묘소를 처음으로 참배했던 것으로 보아, 화서 이항로의 학설을 부정했던 성재 유중교 계파보다는, 끝까지 일관성을 지키면서 결국 유중교에게 반성의 글을 받아냈던 중암 선생을 비롯한 포천의 선비들이 진정으로 화서학파의 정통성을 지키고 가꾸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 비해 독립운동가가 많았던 우리지역에서, 민족정신의 근간을 이루었던 포천의 화서학파 연구가 너무도 도외시 되어, 우리의 정신이 민족정통성에 못자리였음에도 불구하고 후손들의 무관심으로 그 의미마저도 퇴색되고 있음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비근한 예로 우리와 이웃한 춘천에서는 강원대를 비롯한 지역유지와 언론의 노력으로 많은 연구를 하여 성과를 내고 있어, 우리나라 민족주의를 상징하는 정통성이 포천출신 선비에게 있다는 진실마저 위협받고 있으니 걱정이 되는 것이다.
아무쪼록 이제 19세기 동양을 강타한 서양 과학기술 문명의 무력에 밀려 일방적으로 수용한 서양문화가 오늘 우리사회에 끼친 실익을 재검증해야 할 때가 되었으니, 시민과 관련자들의 각별한 관심과 노력이 지속되어, 우리나라 민족정신의 뿌리가 포천이었다는 자존심을 반드시 되찾기를 진심으로 희망하는 바이다.
이 희 용 / 대진대학교 동양철학 박사과정, 시인, 연극연출가, 제3대 포천시예총회장, 광릉숲생태문학회장, 한국스카우트경기북부연맹 감사, 전 경기도예총부회장, 포천시수능시험장유치추진위원장, 포천신문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