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하늘이 초가지붕 용마루까지 내려앉았다. 지붕위의 박순에 하얀 꽃이 피고 감만 한 박이 맺혔다. 한나절이 지나도 비는 그치지 않는다. 이따금 천둥과 번개도 친다. 어머니는 하던 일을 멈추고 얼른 ‘지지직’ 거리는 라디오를 끈다. 그건 우리 집 보물이다. 서울로 돈벌러 간 큰언니가 거의 하나도 안 쓰고 모아 아버지께 송아지 한 마리 사드리고 몇 달 후에 사왔다. 마을 전체에 몇 대없으니 보물일 수밖에.
학교엘 갔다면 지금 산수 시간이다. 숙제를 네 쪽이나 풀어 써야 하는데 못했으니 그건 다행이다. 우리 동네에서 학교를 가려면 개울을 두개 건너야 한다. 응개개울 물이 불어나면 4H클럽 오빠들이나 마을 아저씨들이 업어 건너 준다. 그런데 어제부터 밤새도록 퍼부은 비 때문에 어른들도 건널 수가 없다. 마치미(가산면 우금1리) 저수지의 수문을 열어 놓았단다.
어머니는 커다란 대바구니에 가득 담긴 강낭콩을 깐다. 비 오는 날에도 쉴새없이 할 일은 꼭 있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기대어 비비덕 대며 심심하다고 칭얼거린다. “엄마랑 같이 강낭콩이나 까자.” “재미없어.” “찬장 안의 소금 주랴” 나는 골이 났다. 뒤란 너머 집에서는 ‘까르르 까르륵’ 웃음소리가 들린다. 연년생이기도 하고 두 살 터울박이인 영숙이네 사남매는, 친구인 내가 없어도 너무 재밌다. 우는 소리도 정겹기만 하니 그 집엘 가고 싶은 거다. 그런데 어머니가 말리신다. 아줌마 아저씨가 비 오는 날엔 모처럼 쉬느라 주무실 텐데, 나까지 가서 합세하면 방구둘이 꺼지고 집이 떠나간단다. 어리다고 데려가지 않고 혼자만 놀러 간 언니가 야속하다. “이거나 만들어 봐.” 어머니가 덜 말라 녹녹한 강낭콩 껍질로 방석을 만드셨다. 강낭콩 껍질을 반으로 접어 서로 열십자가 되게 엇 가꾸로 끼워 만드는 거다. 그걸 처음본 건 아니다. 라면땅 봉지를 셀레민트껌 만하게 접어서 아주 커다란 방석을 만들기도 하였고, 아버지의 담배 종이를 탁탁 털어놓았다가도 만들었다. 찌게 냄비를 받쳐놓고 겨울에 질화로 깔개로 썼던 낡은 것이 아직 마루 끝에서 거미줄이 쳐진 체 있다. 몇 개 만들었지만 무료함을 달래기에는 신통치 않다. 어머니가 슬그머니 일어나 시렁에서 무엇인가를 꺼내신다. 어머니 몫이었던 것을 드시지 않고 숨겨놓았던 ‘라면땅’이다. 우르르르릉 꽝-- , 요란하게 다시 천둥이 치고 휘번쩍거리며 번개가 쳤다. “무슨 놈의 비가 얼마나 올려구 이럴까. 응개논뚝이 멀쩡하려나 모르겄네.” 응개개울 물이 넘쳐야 내일도 학교에 안갈 텐데… .나는 라면땅만 먹고 있었다. 30년도 더 지난 옛이야기이다. 그 후 새마을 운동으로 근사하게 다리를 놨는데 지난 추석 지나가는데 문득 생각이 나 유심히 보았다. 승용차가 지나가면 무너지지 않을까 할 만큼 낡기도 했지만 어찌나 작아 보이던지… 조귀순 연락처 011-9873-0593 메일주소 noeul4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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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4년 11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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